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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준만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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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 언론의 과도한 당파성을 지적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파성이 곧잘 개입성과 혼동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과도한 당파성을 자제해야 한다는 선의의 거리두기 원칙이 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회피하게 함으로써 신문의 사회적 영향력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문제마저 낳고 있다.
한국언론의 주요 특성으로 거론되는 ‘발표 저널리즘’은 한국언론이 사회적 개입에 소극적이며 주로 유력 취재원의 발표에 의존하는 취재 관행을 고수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는 주로 취재비용의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가장 싸게 먹히는 보도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당파성이 강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치 분야에서의 개입성이 강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당파성은 ‘편 가르기’ 원칙에 충실하다는 것일 뿐, 그것이 개입성에 요구되는 기사의 질(質)까지 확보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언론의 개입성은 ‘두더쥐 때려잡기’ 게임 수준에만 머무르고 있다. 어떤 사회적 문제가 머리를 내밀었을 때에 그것을 맹렬하게 가격하는 일은 잘 하지만, 문제를 스스로 발굴하거나 머리를 내밀지 않는 성격의 구조적·잠재적·비가시적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신문시장이 가판시장이 아닌 배달시장이며, 가장 치열한 경쟁이 유통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즉, 사회문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은 높은 취재 비용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그 비용 투자에 상응하는 독자의 호응도를 얻기 어렵다는 점이 기존 관행에 대한 재평가를 가로막아 온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취재 비용이 더 들지 않거나 오히려 낮출 수 있는 성격의 개입까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단 취재 시스템이 고정 취재원 중심으로 이뤄지다보니 아예 개입의 문제의식까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신문이 인터넷 등과 같은 신진 매체들과의 경쟁에서 별다른 차별성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로 기능하고 있다. 신문들이 신문들 사이의 경쟁에만 매몰되다보니 산업적 차원의 경쟁력 제고 방안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좀 재미있게 말하자면, 한국언론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겸손하다. 거의 자학(自虐) 수준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정정·반론 보도를 받아주는 데엔 필요 이상으로 오만하면서 기자들의 지적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일엔 “우리는 머리를 쓰면 절대 안돼. 우리는 오직 손가락으로만 일하는 거야”라는 철칙을 강요하는 것 같아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다.
왜 그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고급인력을 ‘받아쓰기’만 하는 타이피스트로 전락시키는 건지 집단 정신분석을 해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언론계에서 ‘스타 지식인’을 키워 한국사회를 좀 들었다 놨다 하게 하면 안 되나? 죽었다 깨나도 그런 일은 대학교수들만의 몫인가?
제발이지 당파성은 죽이고 개입성을 키우면 좋겠다. 물론 그 일을 하려면 부지런히 공부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독자란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지금 한국신문들은 독자들을 인터넷으로 도피하게 만들기 위한 습관을 갖게끔 하려고 안달하는 것 같다.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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