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날, 선후배 구심점 역할 기대"

'기자의 날' 제정 릴레이 인터뷰
1.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1980년 5월 20일, 군부독재와 언론검열에 반대하며 언론자유를 위해 온몸으로 저항했던 선배 기자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 뜻을 되새기자는 기자들의 뜻을 모아 ‘기자의 날’이 제정됐다.



올해 처음 제정된 ‘기자의 날’이 아직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날에 대해 어떻게 의미를 두어야할 지, 어떤 날이 되어야하는지, 궁금증과 함께 ‘기자의 날’에 대한 ‘기자들의 바람’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에 오는 5월 20일 ‘제 1회 기자의 날’, 기자들이 그 날을 기자로서 가장 뜻 깊은 날로 기억될 수 있도록 선‧후배 기자들을 막론해 그들의 목소리를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전함으로써 진정한 ‘기자의 날’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그 첫 편으로 ‘기자의 날’ 제정의 가장 큰 계기가 됐던 고승우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로부터 ‘기자의 날’이 제정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기자의 날'이 제정됐습니다. 1980년 5월 20일 언론검열 철폐를 외치며 제작거부에 동참했던 날이 계기가 돼 이날을 기념하고 ‘기자들만의 하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분주해지고 있습니다. 소감은 어떠신지요?



기자협회에서 기자의 날을 제정한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큽니다. 우선 그것은 역사바로잡기라 하겠습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신군부에게 맨 손으로 투쟁한 역사적 사실을 26년 만에 언론의 정사(正史)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지금껏 80년 언론투쟁은 야사(野史) 수준이었다고 할까요? 언론학자나 언론계의 80년 투쟁에 대한 시각은 신군부의 그것과 거의 동일했으니까요. 두 번째로 기자협회가 기자의 날을 제정한 것은 언론개혁의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해 해직기자들의 복직조치가 법에 의해 취해졌지만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아직껏 그 이행을 거부하고 있는 것에 비춰볼 때 더욱 의미가 큽니다. 80년 해직기자와 민주세력들은 기자협회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자의 날' 제정의 계기가 된 80년 당시 해직기자들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저는 해직 후 해직기자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84년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를 발족시켰고 민언련의 월간 ‘말’ 편집장 등을 거쳐 한겨레신문 창간과정에 동참했습니다.

80년 5월 광주에 행해진 신군부의 만행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참혹하고 비참했습니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한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외신에서는 광주 학살을 전하는데 국내에서는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것에 전국 대부분 언론사의 기자들은 분노했습니다. 광주 현지에 파견된 기자들의 송고 내용으로 많은 언론사에서는 광주의 참극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자들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군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민간인을 백주에 총칼로 살육하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언론검열과 제작 거부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언론검열은 계엄법에 의해 사전에 취해지는 것이어서 기자들의 저항은 신군부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군부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12.12 사태 등을 통해 정치적 야심을 달성키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만적인 폭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서울의 봄’에서 분출된 민주화 열기에 놀란 정치군인들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군부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을 각오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구체적으로 어떤 투쟁이었나요?



80년 봄, 신군부는 부당한 언론검열 등을 통해 민주세력을 탄압하면서 집권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기자협회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5월 20일부터 검열거부를 하기로 결정해 전국 언론사에 통보했습니다.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은 광주항쟁이 발생하기 며칠 전인 5월 16일입니다. 기자협회의 그 같은 노력이 전국적인 언론 저항투쟁의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신군부가 광주폭거를 저지른 것도 기자협회의 저항에 크게 당황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신군부는 군부집권 연장을 획책하고 있었으니까요. 광주에서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고 그런 상황이 점차 악화되면서 기자들은 각 사별로 기자 총회를 열어 향후 대책을 논의했고 5월 20일을 전후해 검열 및 제작 거부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언론인들의 신군부에 대한 저항은 광주지역에서의 민중 항거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엄청난 유혈 참극과 저항이 벌어지는데 기자들이 맨손으로 신군부에게 저항하는 동안 전두환 등의 언론사에 대한 협박 공갈도 대단했습니다. 계엄 확대 조치로 언론사 앞에 장갑차와 무장군인이 진주하는 등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어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듯 긴박한 분위기였지요. 기자들은 대부분 편집국이나 보도국에서 철야하면서 투쟁했습니다. 언론사 간부들은 계엄사의 협박과 경고를 전하면서 신문, 방송, 통신을 제작했습니다. 당시 언론법이 3일간 언론사의 발행, 방송 업무가 중단되면 회사 문을 닫게 되어 있는 악법이었기 때문에 검열거부 등의 투쟁을 하던 기자들도 언론사 간부들의 언론 제작 행위를 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보기에 기자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신군부의 입맛에 맞게 요리되는 모습으로 비춰졌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80년 5월 20일 보도제작 거부 이후 기자선배들이 무더기로 해직됐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80년 5월 광주가 신군부에게 강점된 뒤 검열거부 투쟁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많은 기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투쟁을 접었습니다. 신군부는 광주 강점이후 제일 먼저 언론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유일하게 항거한 집단이라는 점에 놀란 것이죠. 보안사와 당시 문화공보부의 합작으로 언론사별로 검열거부, 제작거부에 앞장선 기자들을 가려내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언론사 사주를 중심으로 한 간부들이 신군부에 협력해 동료 언론인들을 해직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가 오늘날까지 해직언론인을 기존 언론사에서 백안시 하는 뿌리 깊은 원인이 되고 있다고 봐요. 80년 7월부터 전국 언론사에 대한 해직 칼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그 해 9월까지 1천여 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거리로 쫓겨납니다.

해직된 후 다들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신군부는 해직언론인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에 배포해 취업을 방해했습니다. 생존권에 대한 위협이었지요. 일부 해직언론인들은 해직이후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들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해직언론인들은 5공화국이후 지난 26년간 명예회복, 원상회복을 위해 싸웠는데 그 투쟁과정은 몇 단계로 나눠집니다. 첫째, 5공화국 기간 동안 언론운동에 동참해 군사정권의 언론탄압과 언론조작을 폭로하면서 민주화 투쟁을 벌입니다. 6공화국 들어 일부 해직기자들이 재취업 형식으로 해직된 회사에 돌아갔지만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했습니다. 당시 원상회복을 주장하던 해직기자들은 재취업 형식의 언론사 복귀를 거부했습니다.



80년 해직언론인들이 명예회복, 배상 등을 위한 법률 투쟁을 어떻게 벌였나요?



YS정권 들어 전두환, 노태우가 내란죄 등으로 구속되면서 80년 언론인 학살의 진상도 일부 밝혀집니다. 해직기자들은 그 후 행정심판 청구, 국가배상 청구 등을 통해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지만 정부의 반개혁성에 의해 다 좌절됩니다. 광주특별법 제정 당시 80년 해직기자들도 보상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또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정부 들어 ‘80년해직언론인배상특별법’이 추진되었지만 IMF재정난 등을 이유로 폐기되고 2000년 제정된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에 따라 해직언론인들도 민주화관련자로 인정됩니다. 그러나 이 법은 민주화관련자로 인정하는 외에 아무런 보상 등이 없어 너무 허술하다는 비판에 직면해 2004년 개정되어 해직언론인들에 대한 복직권유조항이 추가되었습니다.

복직조치가 권유에 그친 때문인지 80년 해직언론인은 한 사람도 복직되지 않았습니다. 기자협회가 언론사에 복직을 촉구하는 공문도 보냈지만 언론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기협에서 기자의 날을 제정한 이상 해직언론인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한 범 언론차원의 노력이 행해져야 합니다.



‘기자의 날’을 맞는 역사적 의미와 ‘기자의 날’이 오늘날 언론 현장의 기자들에게 확고한 기자 상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는데?



오늘날 언론환경은 과거의 그것과 분명 다릅니다.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억압하던 권위주의 시대가 멀리 사라진 오늘날의 언론에도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급변하는 언론환경 속에서 무한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 언론사의 경영난, 언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견해차, 기자로서의 자긍심 확보 등 언론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문제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기자들이 공론의 장을 마련해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면서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기자의 날 제정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할 것으로 봅니다. 기자의 날은 언론의 역사적 투쟁 정신을 기리려는 취지와 함께 현직 기자의 정체성 확립과 사명감 확인 등을 통해 밝은 미래를 같이 모색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기자의 날’을 운영하는데 있어 발전적인 운영을 위해 지향해 나가야 할 부분과 목표가 있으시다면?



기협에서 ‘기자의 날’을 앞두고 마라톤대회, 출판기념회 등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날을 기자들에게 최고의 기념일로 알릴 수 있는 행사를 계속 발굴해 나가면서 알차게 꾸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고려할 사항의 하나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기자의 날의 역사적 뿌리는 80년 언론인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해 벌인 투쟁을 기리는 것이라면, 기자의 날은 광주항쟁과 닿아있습니다. 광주항쟁이 갖는 역사적 합의는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 평화통일 등입니다. 기자의 날은 바로 이런 민족적 목표를 달성하는 한 계기로 적극 활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협이 광주 5.18재단과 유기적인 관계를 설정해 공동 사업, 행사를 추진한다면 기자의 날과 광주 항쟁은 둘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는 두 개의 부분이라는 것이 확인될 것입니다. 기자의 날과 광주항쟁을 동시적으로 추진하고 기리는 쪽으로 노력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보조를 맞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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