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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선 문화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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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2년의 임기가 3월말로 끝납니다. 그동안 뭐했느냐고 누가 물으면 고개를 쳐들고 드릴 말씀은 없으나, 신문윤리위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 점만큼은 감히 초들고 싶습니다.
2년 전에 한국기자협회에서 신문윤리위원으로 추천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문윤리위가 무엇을 하는 동네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협회의 명령이니 회원으로서 수굿이 따라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윤리위 회의 말석에 앉아 있었지요.
윤리위원은 전 대법관 출신의 위원장을 포함해 언론계 인사 7명, 비언론계 인사 6명으로 구성돼 있더군요. 저는 언론계 `붓끝’이나 인생 `짬밥’이 다른 위원들에 비해 한참 짧은 처지여서 늘 조심스러웠습니다만, 기자협회 회원들을 대신한다는 생각에서 때론 입 놀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위원들께선 연배를 개의치 않으시고 자유롭게 토론의 장에 끼워주셨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매달 한 번씩 정기적으로, 혹은 긴급 사안이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윤리위 회의의 열띤 분위기입니다. `신문 윤리’를 구닥다리 구호로만 알았던 저는 세상 경험을 할 만큼 하신 분들이 신문 기사 하나를 두고 콩팔칠팔 따지는 것을 보고 경외마저 느꼈습니다.
신문윤리위는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정치권력으로 신문기사 내용을 규제하려고 시도하자, 신문업계가 이에 대응해 자율 심의하겠다며 1961년에 만든 단체라고 합니다. 현재는 각종의 외부 권력이 신문 윤리를 감시한다며 나서고 있으니 신문윤리위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약화했으나 내부 감시 장치로서의 존재 의미는 여전합니다.(성병욱 세종대교수의 논문 ‘왜 신문윤리위원회인가’ 참조)
이 존재 의미를 살리려면 역시 현장의 기자들이 신문윤리위의 신문기사 심의 결정 내용을 숙지하고 실천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매달 한 번씩 심의결정문이 각 회원사에 통보가 됩니다만, 이 내용이 잘 전파되는 지 의문입니다. 이미 지적한 사항들이 또 심의에 오르는 경우가 많더군요.
최근에 심의대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난 ‘광고성 기사’, 또한 시대 변화에 따라 기준이 바뀔 수밖에 없는 ‘폭력과 성(性) 표현의 선정성’ 등은 기자 개인과 더불어 신문업계 전체가 고민해야 할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기자 개인이 작은 실천만으로도 지킬 수 있는 `윤리’도 적지 않습니다. 사회적 범죄 혐의자의 반론권 보장, 국내외 매체로부터 기사 소스를 얻었을 때 정확한 출처를 밝혀주는 것, 제목에서 우리말 어법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한자 조어(造語)를 하는 것, 유가증권·부동산 투자 추천 때 복수의 전문가 의견을 듣는 것 등입니다. 이것들을 어긴다는 것이 개별 기자로서는 하찮을지 모르지만, 다달이 반복돼 쌓여있는 위반 기사 건수를 보신다면 입이 딱 벌어지실 것입니다.
현재 신문업계는 몇 개의 메이저 매체를 제외하고는 생존 자체에 급급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 끼어들어 이러쿵저러쿵 하기엔 `윤리’라는 단어 자체가 염치없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핑계로 언론이 세상의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진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대의 윤리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언론의 숙명입니다.
저는 그동안 소속 회사 동료들의 기사 뿐 만 아니라 스스로의 기사가 심의 대상이 되는 현업 기자로서 윤리위 활동을 하며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윤리위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했던 것은 자율심의기구로서의 신문윤리위의 존재 이유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성찰할 줄 아는 조직만이 당대 권력과 자본의 부패를 감시할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윤리위원 임기를 마치면서 신문윤리위가 최근 배포한 책자 `신문윤리강령’을 찾아 책장 맨 앞에 꽂습니다. 기자로 사는 한, `윤리’를 지키려고 애쓰고, 지킬 수 없었으면 그런 자신을 괴로워할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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