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사태와 '삼성'

언론사는 무결점의 아성이 아니다. 기자도 전지적 판관이 아니다. 모든 기사의 관련자들은 그러기에, 자신들의 입장을 언론사와 기자에게 충분히 전달할 권리를 갖는다. ‘천부적’ 항변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기사는 소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운 좋게 소송은 피하더라도 당사자들의 충분한 의사표명이 결여된 기사는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고, 좋은 기사가 되기도 어렵다.

삼성도 항변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항변도 ‘삼성이 하면 다르다’고 한다. 한 두번 삼성 거스르기를 시도했던 기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다. ‘역시 삼성’이라는 것이다. 불만을 넘어 일부에선 ‘삼성공화국’이니 ‘삼성독재’니 하는 삭막한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삼성이 다른 이유’는 우선 그들이 언론계 광고시장의 최대 실력자라는 점이다. 삼성의 한마디는 여타 취재원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최대 광고주의 심기를 거슬려야 하는 언론사로서는 자존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존을 걸어야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삼성이 ‘남다른’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로비’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국가기관을 능가하는 정보와 자금, 그리고 조직력을 앞세운 그들의 행태는 로비를 넘어 ‘작전’ 수준이다. MBC 이상호 기자가 공개한 X파일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삼성의 대(對) 정치권, 공권력에 대한 ‘작전일지’가 아니었던가. 멀리 X파일이 아니라도, 삼성 기사를 출고해 놓고 초등학교 졸업 이후 연락이 끊겼던 동창이나 먼 친척으로부터 뜬금없는 전화를 받아 본 기자라면 삼성 로비의 매운 맛을 실감했을 것이다.

삼성의 로비가 가공한 것은 이렇듯 삼성이 자본은 물론 전통적 인간 영역까지도 장악했기 때문이다. 교육과 환경은 물론이고 비(非)자본 인간화의 성역으로 남아있던 예술의 영역마저 삼성의 흡인력에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은 돈과 인간을 섞어 그들만의 ‘또 하나의 가족’ 망(網)을 직조해냈다. 이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모든 언론사나 기자에게 삼성은 ‘돈과 인간을 포기해야할 것’이라는 공포를 구성해 내는 데 성공했다.

<시사저널>사태는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될 엄중한 징후다. 삼성은 독립 언론 영역에서까지 해서는 안 될 행태를 보였다. 삼성은 자사임원 관련기사가 보도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간부를 시사저널로 보내 기사를 빼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를 받아들인 금창태 사장은 편집권을 침해한 것이요, 삼성은 ‘재벌권력’의 위용(?)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이 반복될 경우, <시사저널>은 삼성의 하위 언론조직으로 재편될 가능성마저 있다. 또한 <시사저널>의 남은 기자들은 언론계의 좀비로 떠돌며 거역할 수 없는 공포를 재생산하게 될 것이다.

지금 숱한 성역과 외압과 맞서 싸우며 버텨온 한 언론이 단지 삼성의 인사정책을 비판했다는 그 이유 하나로 무너지고 있다. 단지 기자의 양심을 지키려했다는 이유만으로 용기있는 기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정의의 외침에 귀 기울이자. ‘돈’이 통치하는 시대, 아니 ‘재벌권력’이 언론자유를 무참히 침해하는 시대에, 언론이 담당해야할 새 소명이 기다리고 있다. 편집위원회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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