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가 더 이상 TV가 아니듯 신문은 더 이상 신문(Paper)이 아니다. 취재, 편집, 유통의 영역에서, 그리고 시장 내 가치사슬의 관계에서 인터넷, 모바일은 물론이고 포드캐스트나 보드캐스트(Vodcast) 등 변종들과 마주하고 있다.
적어도 신문 기사는 종이를 완전히 벗어나서 다양한 장치들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즉, 평면적인 신문이 지배하던 시대가 종료된 것이다.
모든 뉴스는 상호 융합되는 환경에서 흡수되고, 디지털화한 뉴스는 이용자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자유롭게 응용, 확장되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미디어의 마지막 종착지는 쌍방향(Interactive) 미디어이며, 이 풍경에 선 신문의 정체성은 고통스럽다.
이에 따라 세계의 유력지들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뉴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거대한 기술진보에 힘입은 비디오 서비스를 외면할 수 없게 됐다. 콘텐츠가 종이 이외에서 폭넓게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문이 상대하는 시장에 대한 정확한 통계이다. 신문 독자 또는 비구독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연례적인 데이터가 요구된다. 또 광고주들이 신문기업과 신문, 신문의 웹 서비스 및 콘텐츠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 신문산업의 환경에서는 기초적인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이다. 개별 신문기업의 유가부수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심지어 대외적인 수치와 내부적인 수치가 다르다. 이것은 인터넷 트래픽 자료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가령 A신문이 유가부수를 150만부를 발행하고 있고 B신문이 20만부를 발행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시장과 독자, 콘텐츠 전략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통계는 전산업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의미있는 비전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하루 순방문자수가 7만명인가, 30만명인가 아니면 훨씬 그 이상인가는 인터넷 부문의 규모와 장기전략을 결정할 때 가장 기본적인 수치다. 그런데 그 기초자료도 쉽게 공개하기 어려운 게 국내 실정이다. 한 신문사닷컴은 광고주 제안서에 순 방문자수를 10배 이상 부풀린다.
그런데 이러한 가공은 결국 신문기업의 신뢰도를 저하시키고 시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시작이 된다. 이제 모든 것은 기술로 확인된다. 기술은 독자의 지역과 직장, 성별 등 모든 경로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 특정 기업과 시장, 소비자들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도식화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이다.
국내 신문기업이 더딘 진보의 걸음을 걷는 동안 이미 디지털은 치고 들어와 버렸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오만하게 부풀리면서 지켜온 권위와 권력이 붕괴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참화로부터 벗어나려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신문의 기본은 무엇인가?
질문 1. 우리가 상대하는 독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독자와 마주하지 않는 신문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 우선 독자회원 정보를 가져야 한다. 이동통신사업자들이 운영하는 웹 사이트나 오프라인 매장들에 가면 이용자들의 소비 패턴까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경제적인 요금제 전환으로 유도하기까지 한다.
신문이 구독자들에게 구독 이상의 만족스런 혜택을 돌려주기 위해 인터넷은 적극 활용돼야 한다. 시장규모적으로나 콘텐츠 역량이 부족한 신문기업이 획기적인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따라서 닷컴이나 디지털 부문에 매출 증대를 주문하기보다 기본을 짜기 위한 노고가 필요하다.
일단 인터넷으로 구독자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고 이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나와야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으로 유인되는 독자들을 확보하는 것은 신문독자의 가능성, 지속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한 명의 독자와 스킨십을 강화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는 일이다.
반강제적인 구독자 캠페인으로 확보되거나 기업-관공서에 할당된 신문독자는 디지털 미디어에서는 의미있게 ‘포함되지’ 않는다. 신문의 구독자 관리 부서에서도 의미있는 독자들과의 실질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는 착안이 요구된다. 가입자 DB가 없는 이동통신사업자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질문 2. 우리가 생산, 유통, 보유한 콘텐츠는 어떤 수준인가?
일반적으로 신문 기사는 전통적으로 신뢰를 갖는다. 신문기업은 그것을 무기삼아 시장과 독자들 위에 군림해왔다. 하지만 신문 콘텐츠가 지금도 그러한 것인지 묻는 독자들이 늘고 있다. 매일 액티브 블로거(Acitve Blogger)들은 신문 기사를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잘못된 정보로 작성된 기사가 하루종일 인터넷으로 소비되는데도 정작 그 기사의 주인공과 뉴스조직-신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기사를 삭제하거나 수정할 때쯤이면 이미 그 신문기업과 기자는 이용자들에게 낙인찍힌지 오래다.
이렇게 늦은 대응은 국내 신문사들이 뉴미디어를 위해 열어놓은 전담부서들의 역량과 뉴스조직내 위상을 감안할 때 당연하다. 뉴스를 인터넷으로 제공하면서도 닷컴이나 디지털부문은 단순한 ‘유통’의 부서지 콘텐츠의 생명력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 기사 아카이브의 수준은 형편없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찾기 위해 컴퓨터에 CD를 넣고 일일이 찾거나 먼지가 풀풀 쌓인 서류철에서 색이 바랜 사진을 찾는 신문사도 있다. 콘텐츠를 고민하지 않고 콘텐츠 ‘판매’에 몰두한 나머지 이제 자신의 재산인 ‘콘텐츠’가 썩어가는데도 속수무책인 것이다.
질문 3. 우리의 비전은 무엇인가?
불과 2년 전부터 일부 신문기업 편집국에는 디지털 부서가 신설됐다. 인터넷 뉴스를 전담하는 부서다. 또 미디어 전략을 챙기는 전담조직도 확대되는 추세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의 신문에서는 디지털 부서는 한직(閑職)으로 분류된다.
이런 가운데 유망한 신문기자들이 신문을 떠나고 있다. 신문기업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털사이트, 대기업, 국가부처 등등 올해만 해도 전도가 유망한 수십명의 기자들이 신문을 버렸다. 비전없는 신문은 어제도 오늘도 ‘구조조정’을 만고불변의 ‘해법’으로 찾고 있다.
‘20촌 친척’을 쓴 신문이 독자들로부터 코메디 게시판에 헌액됐다. 한 사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를 오락가락하는 논조가 ‘신문’을 꼴사납게 한다. “제발 공정한 사실만을 써달라”는 편파성 시비, 대기업 비판기사를 둘러싼 기자와 경영진의 대립 등 올드 미디어의 구차한 소동이 넘실댄다.
이같은 심란한 자화상은 종사자들을 경제적으로도 우울하게 한다. 실질임금의 상승률이 수직하강한지 오래다. 그래도 우리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보여달라는 호소도 만만찮다. 하지만 강력한 오너십과 네트워크가 반전의 원동력이 돼야겠지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 충분치 않다.
반면 세계적 유력신문들은 가장 베테랑 저널리스트를 디지털부문으로 투입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 신문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과감히 시작했다. 지금까지 유지된 시스템과 관행을 혁파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많은 신문기업들이 그렇게 혁신의 길 위에서 변하고 있다. 한 신문은 방송사 인력을 영입하고, 또다른 신문은 기자는 물론이고 사원들을 주요 경영회의에 참여시키고 있다.
관건은 그러한 혁신의 강도이다. 혁신은 부분적이고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전면적이고 지속적인 것이다. 특히 신문의 기본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고, 독자-시장-콘텐츠에 대해 포기할 부분과 집착해야 할 부분을 재정리할 때 갖춰지게 돼 있다.
가령 A신문이 비디오 콘텐츠 역량을 강화한다고 할 때 그것은 A신문이 시장과 독자, 투자재원, 인프라가 충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자도 아카이브도 인프라도 부족한 B신문이 따라가서는 안된다. B신문만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물론 특정한 신문기업의 진로에 대해서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컨설팅해주는 제3의 기업이나 전문가들이 부상하지 않는 것은 안타깝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상식의 눈으로 볼 때 안전하다. 굳이 제3자의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신문기업의 미래는 없다. 그러나 또한 혁신하는 신문기업의 미래는 있다.
이 갈림길에서 신문기업이 해야 할 일은 정해진다. 우선 선진적인 콘텐츠 기업들이 소비자-시장-콘텐츠를 대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모든 것들로부터 교훈을 찾고 의기투합해야 한다.
콘텐츠의 규모와 다양성, 독자와의 접점을 마련한 중앙일보, 새로운 콘텐츠와 플랫폼을 향해 가는 조선일보, 인터넷을 통해 브랜드를 창조하는 국민일보, 진보의 UCC로 곧추 서려는 한겨레신문의 노력 등 국내 신문기업에서도 배울 것은 얼마든지 있다.
물론 크고 작은 규모의 신문사들이 보여준 ‘혁신’의 사례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거나 시장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모든 신문기업들이 자신에 걸맞는 옷을 빨리 찾지 못하면 이제야말로 서서히 무너지는 것만이 남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겸 한국경제 미디어연구소 최진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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