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했고 앵글은 다종다양하다. 단일의 정치권력이 우산대 역할을 하고 사회의 줄기들이 임석상관을 향해 경례하듯 우산살 노릇을 하던 시대가 지나갔다. 언론이 지칭하듯 문화권력 기업권력 유통권력 인터넷권력이란 메타포까지 생겨날 정도로 권력은 분화되었다. 각 분야 자율의 구심점이 다양해진 것은 분명히 진보다. 여기서 가장 주목받는 공간이 한국 사회의 공론장인 언론이다. 언론권력 특히 메이저신문권력의 시대담론 및 전파력은 대단하다. 멀티미디어가 범람해도 의제설정 매체주도력은 아직 따라올 자가 없다. 한국의 모든 사안을 만기친람하며 공론장을 매일 휘젓고 있다.
힘이 센 그대, 국민에게 찬찬히 스며드는 감동의 메아리보다는 현존 권력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독설공장이여. 그대들은 지난 10월 막바지 ‘386 간첩단’ 보도광풍을 쏟아냈다. 혐의자의 메모가 ‘포섭현황 리스트’가 되고 관련 접촉인사들은 줄줄이 친북 적색분자로 낙인 찍힌다. 주요 지면에 시장좌판처럼 펼쳐진 뉴스 공세의 최종 공격 각도는 청와대를 향한다. 권부의 공간을 얼치기좌파 소굴로 호명하고픈 심정에서 한발 더나가 평양 끄나풀과 선을 댄 간첩 비트로 몰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대들은 ‘사설’이란 아주 존귀한 글발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여론을 대변하고 알 권리의 가닥을 잡아준다는 ‘전가의 보도’. 그 사설들이 ‘햇볕아래서 서울거리를 활보하던 간첩들’ ‘나라 흔드는 세력 속에 활개친 간첩 그림자’ ‘청와대 386은 안전한가’ ‘386간첩단, 빙산의 일각 아닌가’… 참 많은 제목의 언설을 쏟아냈다. 아직도 못 다한 말이 많을 것이다.
한 시대를 건너기 위해 시대의 모순과 맞닥뜨리며 저항한 뼈아픈 세대 386. 논객들이‘386’이란 메타포를 자신들의 여론몰이를 위해 희화화시킬 수 있는 자격을 누가 부여했을까. 일심회 사건은 1주일도 안돼 잠잠해진다. 치고 빠지기식 보도여서 팩트가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사건 담당 서울중앙지검이 “언론보도가 나가도 너무 앞서 나간다”고 한마디 하자 그 ‘~카더라’통신은 의혹 부풀리기 풀무질을 잽싸게 멈춘다. 옛 동독 첩보기관 ‘슈타지’ 공작과 닮았다며 작약하던 그대들은 이제 차분해지려나. 혐의가 팩트의 거증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법기관서 확정되면 그때 여론 단죄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대들은 친북 혐의 몇몇이 부각되면 대한민국이 무너질 듯한 호들갑에다 모든 원죄는 ‘386정권’에 뒤집어 씌운다. 그대들의 지극하고 지속적인 ‘386 해코지’는 역으로 1980년대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386을 애써 역사의 짐처럼 부리고 싶은 언론권력 그대여, 386은 출생연도와 대학교육 유무를 따지는 작은 범주가 아니다. 불의한 독재의 군화발이 거셀 때 온전히 가슴 하나로 저항했던 순수였다. 그대들을 포함 모두가 잠든 것처럼 침묵할 때 비아냥에 머물지 않고 외치며 달렸고 닭장차속의 치욕을 기꺼이 감수했다. 숱한 자결이 잇달았고 검붉은 주검들이 우리들 품안에 안겨왔다.
존귀한 글발의 힘을 가진 그대들이여, 번득이는 그대 펜 끝의 날카로움이 역류하여 그 시대에도 흘러들어 왔더라면 젊은 채 사라진 옛 기억들은 해맑게 청춘을 누볐을 것이다. 저항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다. 한국의 구조적 뼈대를 파악하는 데 도구가 필요했다. 요즘 그대들의 논리는 그 당대의 사회학적 상상력과 사회 모순을 인식하는 젊은 사고 틀을 김일성 주사파의 하부체계와 연관짓고 싶은 모양이다. 자칭 ‘전향386’으로 개과천선했다는 몇몇 무리들의 회견을 앞세워 말없이 일상에 충일한 수백만 386을 철지난 주사파의 자장 아래로 끌어내리고 싶은 게다. 포섭이란 말로 굴비 엮듯 묶고 싶겠지만 386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노파심을 거두라. 혹여 정치권에 제 나름의 당파를 지어 정치인으로 운신하는 ‘명망가 386’ 몇몇을 들먹여 적대감을 보이고 싶거든 당당히 그 이름을 호명하고 한판 붙으라. 역사의 진행형으로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는 수백만 386을 더 이상 욕보이지 말라. 세습독재 김정일 왕국의 시대착오성에 386을 운위 말라.
대통령 직선제 부활로 상징되는 ‘87체제’를 계기로 386 물결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한국의 허리가 되고 시장경제의 실무진이 되었다. 386은 기자사회의 중추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흠결도 있지만 세계 최고의 조선제조 수주량, 컴퓨터 보급률, 첨단 IT제품을 과시하며 교육 투자 열기는 하늘을 찌른다. 논객들의 “나라 무너진다”는 절망과 통탄을 386은 현장에서 노동의 구슬땀으로 직시하고 있다. 386을 정치적 당파성과 편견으로 덧씌우는 것은 당신들의 기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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