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갈파했다. 이 말이 그럴듯 하다면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해야 한다. “삶의 뿌리 흔드는 정부”, 20일자 한겨레 신문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희망을 잃었다는 얘기다.
실제의 내 기억에도 6-70년대, 아니 80년대까지 끼니를 걱정하고 군사독재가 정신마저 초겨울처럼 황량하게 만들 때도 이렇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삶은 전혀 돌보지 않아도 남만큼은 살 것 같았고 한겨울의 독재조차 우리가 이기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분명 훨씬 풍요로워진 지금 왜 사람들은 절망하고 분노하는 것일까. 여러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열심히 일하는 것 만으로는 집을 살 수도, 애들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한겨레신문의 제목처럼 정부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또는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주장대로 시장에 맡기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일까?
우리는 부동산과 교육 문제에 대해 철저히 이중적이다(여기에 의료문제까지 더하면 핵심적인 ‘삶의 세 필수재’가 되는데 한미 FTA는 바야흐로 의료에 관해서도 사람들을 절망의 늪에 빠뜨릴 전망이며 그리하여 다시 우리들의 이중성을 드러낼 것이다). 예컨대 행정수도를 이전한다고 했을 때 한나라당 쪽의 선동도, 또한 우리당 의원들의 우려도 엉뚱하게도 서울의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데 맞춰졌다. 언론은 또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가.
정부는 아직도 말을 못하고 있지만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행정수도 이전의 목적, 또는 바람직스러운 결과이다. 왜 집값이 떨어지는데 문제가 되는가? 자산 가격의 하락은 상대적으로 근로소득의 상승을 의미한다. 집없는 사람들은 집을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생기고 집 한 채 소유자는 적어도 중립적이다.
공공의 관점에서 집값 하락, 정확히 얘기해서 버블 붕괴 형태가 아닌 예고된, 질서정연한 하락은 일반 국민의 복지를 향상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로또의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걱정한다. 강남을 욕하면서 모두 강남을 꿈꾼다. 집값이 오른다는 것이 확실해 보일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을 ‘선점’하려는 것은 호모에코노미쿠스의 관점에서는 합리적 행동이기도 하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 입으로는 공교육을 강조하지만 내 자식에게만 혜택이 오는 사교육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 부동산도, 교육도 (그리고 의료도) 아주 강한 공공성을 가지지만 경제학적 의미의 공공재는 아니다. 사유가 가능하며 여기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모두 그렇게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전형적인 ‘피의자의 딜레마’이다. 집값과 교육비(의료비)가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손해를 본다. 시장경제의 원리(사실은 시장의 독재)가 그런 결과를 낳는 것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히 말할 때가 되었다. 스스로 ‘삶의 필수재’가 갖는 공공성을 부인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유세·교육세의 충분한 확보와 불로소득의 차단, 결국 자신의 노력만으로 필수재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않는 한 개인도 사회도 붕괴한다.
참여정부의 실패는 올바른 방향을 잡고도 재경부 및 건교부, 이들의 배후에 있는 기득권자들의 힘에 밀려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냈다는 데 있다. 대다수 언론은 국민의 이중성을 교묘히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국민의 절망이다. 애를 낳지 않고 이민을 꿈꾸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유일한 복수이고 그것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사회 전체를 붕괴시킬 것이다. 이제 기자들은 바로 그 극소수에 속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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