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들’은 서로 항상 지나쳤다. 분단 반세기 역사가 서서히 무너지는 현장을 누비면서도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했다. 열심히 남들 얘기를 적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만남은 갖지 못했다. 그런 놈들이 만났다. 그것도 떼거리로. 놈‘자’(者)자를 쓰는 남북 기자들의 장장 61년만의 만남이었다.
역사적인 2000년 6·15 공동선언후 많은 남북 부문간 교류가 있었다. 기자들은 열심히 이를 취재하고 기록했다. 그러나 정작 기자들끼리의 만남은 소원했다. 그런 면에서 기자들은 역사의 방관자였다. 그런 기자들이 금강산행 막차로나마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그것도 북의 핵실험으로 남북 당국간 교류가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다.
북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마련된 토론회 자리가 뚜렷한 이유없이 연기됐다. 토론회 며칠 전에는 급기야 조류독감이 익산서 발생해 자칫 북의 초청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북한행은 실제로 떠나기까지 확신할 수 없다 했다. 가깝고도 먼 민족의 현실이었다.
그래서일까? 금강산 가는 길에 상서로운 무지개가 떴다. 금강산은 오는 사람을 알아본단다. 우리 가는 길목에 날이 갰다. 우리의 만남이 이뤄진 날 햇살이 봄날처럼 따뜻했다. 든든한 금강산 병풍이 칼바람을 막아줬다. 눈부시게 흰 눈을 머리에 인 우리의 일만이천봉은 알프스보다 아름다왔다. 역사는 변방에서부터 시작한다.
금강산은 이산가족 면회장소다. 짓다만 이산가족 면회소를 지척에 둔 외금강 호텔에 머물며 우리 남측의 기자 1백15명과 북측 기자 57명은 그렇게 이산가족처럼 만났다. 토론회는 공식상 사전 조율돼 좀 딱딱했다. 늘 그렇듯 첫 만남은 어색한 것이다. 그러나 북측 대표가 말했듯 이번 만남은 시작에 불과했다. 과연 그랬다. 토론회 후 주변 명승지 삼일포에서 가진 산책 중 우리는 누가 따로 할 것 없이 자연스레 어울렸다. 남측에서 30대 젊은 기자가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하면 저쪽에서는 일흔 가까운 대선배 기자가 “선생님”하고 친근히 다가온다. 선군정치에서부터 핵문제까지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사항과 근무 방식도.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이어진 만찬장에서는 “우리가 진작 만났어야 했는데…”라는 탄식과 통일의 건배사가 연이어 울렸다.
일부에서는 이같은 만남을 사전에 좌파 언론의 만남이라 했다. 특정 보수 신문이 빠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토론회는 남측에서 통신, 신문, 인터넷, 방송, 언론유관 단체가 망라된 모임이었다. 백보 양보해서 공동성명 내용상 좌파라는 당신들의 말이 맞다 하자. 이른바 감상적 통일론을 우리 역시 경계한다. 그러나 남은 좌향좌, 북은 우향우 서로 조금씩 움직여야 하나될 것 아닌가. 나는 꿈쩍않고 가만히 있을테니 너만 이리 오라는 말은 가당찮다. 역사는 준엄히 물을 것이다.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고. 화해의 물결을 거스린 채 과연 통일 시대의 언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됨의 길목에서 이제는 더 이상 놈이 아니다. 서로의 ‘님’이다.
언론은 체제 수호의 사상적 최후 보루다. 그런 남북 언론이 힘들게 만났다. 이제 최소한 등을 비빌 언덕이 생겼다. 이 같은 만남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같이 할 수 있는 일부터 뜻을 모아 남북간 기자 통합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장차 통일 언론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공동선언문에 적시했듯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 평화, 통일에 이바지하는 공정보도에 저마다 힘써야 한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펜으로만 쓰지 않고 우리의 몸으로 써가는 과정에 있다. 놈들이여, 아니 님들이여,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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