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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원태 경향신문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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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회장 변용식)의 창립 50돌 기념행사가 있던 4월6일 저녁 원로 언론인 권오기 선생은 50년 전 한국신문업계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엔 신문이 두 페이지 짜리였습니다. 기자들은 연필을 들고 다녔고, 만년필을 가진 기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윤전기를 제대로 갖춘 신문사도 없었습니다….”
필자는 이 원로 언론인의 강연을 듣는 동안 “1947년엔 정말 그 정도였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이 겨우 두 쪽 짜리였다니! 그의 강연은 나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필자가 50년전 한국 언론상황을 일부 소개한 것은 비슷한 시기의 미국 언론 상황과 비교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반 세기 전 미국 저널리즘에 관한 서술은 데이비스 메릿(Davis Merritt)이 쓴 ‘공공 저널리즘과 공적 생활: 왜 뉴스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Public Journalism and Public Life: Why Telling the News Is Not Enough, 1995)’라는 책에 나온다.
“35년전(1960년)만 해도 대통령 보도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은 폭격과 대화의 양면 전략으로 북베트남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다. 7월 어느 무더운 날의 오후 옵저버 신문의 사회부장이던 나(저자 메릿)는 샬럿 마을의 주민 90여명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 존슨 대통령은 밤새 워싱턴과 사이공의 군 지휘관들과 얘기했다고 말하면서 매우 지친 기색을 보였고 “(전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아) 좌절감에 빠진다”고 말했다. 주민 90여명이 존슨의 말을 들었고, 이것의 보도에 관한 백악관의 규칙도 없었지만, 편집국 간부들은 존슨의 발언을 보도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메릿은 이 대목에서 요즘엔 대통령의 말 한 마디, 뉘앙스, 말실수 등 거의 모든 것이 좋은 기사거리가 된다며 저널리즘의 엄청난 변화를 서술했다. 그는 요즘 기자들은 대통령의 말을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분석과 논평을 가하며 후일 쓰기 위해 저장까지 해 둔다고 썼다. 대통령 보도에 관한 한 한국에서도 요즘 이 정도의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닌가 싶다.)
“40년전(1950년) 기사들은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 백인이 아닐 경우 반드시 인종에 관한 묘사를 했다.” (한국상황과는 별 상관 없지만 그래도 참고할 만하다. 미국 언론이 당시 인종 차별적 보도를 했음을 보여준다.)
올 들어 기자 경력 21년째에 접어든 필자에게도 초년 시절과 현재 사이엔 엄청난 변화가 눈에 띈다. 외신부(국제부) 근무 기간이 긴 필자의 기억을 되살려 보겠다. 1987~1988년 KBS 근무 시절엔 외신 텔레타이프가 대문자로만 된 영문 외신(통신)을 노란 두루말이 종이에 찍으면서 끊임없이 ‘두두두둑”하는 소음을 냈다. 그 뒤 세계일보에서 근무할 땐 차곡차곡 접힌 하얀 종이(좀더 고급종이)가 텔레타이프로 끌려 들어가면서 영문 외신이 찍혔다.! 수년 전부터는 외신이 수신 소프트웨어가 깔린 개인 컴퓨터에 바로 입전돼 기자들은 요즘 컴퓨터로 외신을 읽거나 검색한다. 이제 외신부 기자들은 소음과 먼지로 가득한 티티(TT)실에 들어가 티티 종이를 찢지 않아도 된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엔 서울 중구 정동 22번지(경향신문의 주소)의 사무실에서 뉴욕타임스니 워싱턴포스트니 아사히니 르몽드니 슈피겔이니 하는 중요 외국 매체를 바로 접할 수 있다. CNN의 자체 광고 문안 처럼 “단지 한 클릭 거리에 떨어져 있다(Just one click away.)”는 말이 실감난다.
권오기 선생은 “반세기 동안 신문에 아무리 큰 기술적 발전이 있었다 할지라도 결국 신문의 내용이 중요하다”며 회고담을 끝맺었다. “기자가 쓴 기사가 무슨 내용을 얘기하느냐가 중요하다”는 평범한 진실은 긴 세월과 엄청난 기술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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