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푸릇함이 온 국토를 싱그럽게 하고 있다. 맑은 봄 햇살은 가만있어도 어깨를 들썩거리게 한다. 세상을 예의주시하는 기자들이라고 춘흥에 무감할까. 사건과 사건 사이에 정위치하고 팩트를 찾아 사람들에게 묻고 묻는 사이, 계절의 여왕은 메마른 가슴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 아침도 출입처의 정황을 훑어 본 다음 기사발제를 마쳤다. 잠깐 사이 점심이 지나고 취재원과의 기나긴 추적을 벌였다. 기사를 구성을 마치자마자, 스트레이트를 완성해 송고하고 추가 취재에 돌입한다. 사안의 가닥을 잡아주는 해설박스를 잇달아 꾸미느라 자판 두드리는 소리는 해 저물녘을 난타한다. 야근이 따로 있는가. 취재와 편집이 마무리되지 않는 한 영원히 야근 속을 가로지른다. 마감시간은 돌아서면 찾아오는 빚쟁이마냥 화급하고 만성피로는 저승사자처럼 뒤통수를 툭 건드린다.
늦은 밤 귀가 후 곤히 잠든 자식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말간 표정이 세상 시름 다 잊게 한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다. 그런 초등학교 4학년 딸이 간만에 말을 붙이더니 건넨 말. “아빠, 나를 키우려하지 말고 나랑 놀아죠.” 갑자기 아득해진다.
돈 벌어오는 가장. 세상을 추적하는 저널리스트. 밥벌이의 지겨움을 감내하는 중년. 딸에게 나는 무엇이었던가. 어린 딸에게는 함께 놀고 싶었지만 언제나 섭섭하기 만한 아빠의 자리가 제일 간절했던 것이다. 가정의 달 5월의 트렌드를 취재한 적은 있었지만 가정적인 트렌드 중심에 살갑게 서본 적은 없었다. 아빠로서 서툴렀고 자식들의 눈높이에선 썰렁했었다. 겉은 한결 같은 대나무였지만 속은 텅 비어버린 공허감이 밀려온다. 일 잘한다는 직장인 역할이 자상한 아빠를 대체하지 못한다.
오늘날 기자들에게 닥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상의 격변은 세태차원을 넘어 속도의 차원으로 다가온다. 주도면밀하게 관찰할 대상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달아난다. 다채널 무수한 미디어들이 범람한다. 기사 채취의 무한 경쟁은 막막하다. 시각의 날은 더욱 벼려야 하고 기사 문체는 독특해야 한다. 분석은 세밀해야 하고 해설은 명쾌해야 한다. 시류를 잘 담아내야 하지만 동시에 남보다 한 발짝 앞서있어야 한다. 세상을 읽어 세인들에게 읽게끔 서술하는 숙명은 멀면서도 가깝다. 기사를 주무르며 기사 속을 꿰고 엮는 기자의 나날은 황망하면서도 자잘하다. 기자의 속성을 타 직업에선 흉내낼 수 없고 맡은 바 책무는 심대하다. 이런다고 불충한 아빠의 실상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아빠의 빈자리가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에 가족배려 경영이 화사하게 번지고 있다. 가정이 행복해야 일도 신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업 야근을 될 수 있는 한 없애고 정시에 퇴근하도록 채근한다. 현명한 기업들은 직원들의 자녀들을 회사로 초청해 사업장을 놀이공원처럼 꾸며 게임대회 노래자랑을 펼친다. 아빠 엄마의 직장을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만들어내는 제품도 자랑스러워 한 단다. 답답한 언론사 사무실에 켜켜이 쌓인 신문과 서류더미들 사이로 ‘가족사랑경영’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일더미만 횡행한다.
가족과 즐겁게 지내는 행복감은 약 1억원 상당 연봉 상승의 만족감을 준다는 런던대학교의 이색연구가 나왔다. 소중한 것들은 무작정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쏜살같다. 자식들의 어릴 적 기억에 기자아빠 기자엄마와 신나게 뒹굴었던 추억을 선물할 때다. 사랑은 몸으로 겪는 체험이다. 눈부신 5월. 기자들이여, 자식들의 손을 잡고 빛나는 계절로 뛰쳐나가자.
편집위원회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