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희 사건과 민족주의 논쟁


   
 
  ▲ 이활웅 재미 칼럼니스트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버지니아공대에서 32명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인이 한인 1.5세였다는 보도에 우리 모두는 너무나 놀랐다. 그리고 혹 인종적 보복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도쿄대지진(1923년), 만보산사건(1931년), LA폭동(1992년) 등 해외동포들이 집단학살이나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정부와 국민에게 세 번이나 깊은 조의를 표했다. 또 정부는 조문사절을 보내려했는데 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이곳 미주동포들도 여러 곳에서 희생자와 유족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모금운동도 벌였다. 그러나 미국정부나 언론은 범인이 한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정부나 국민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침착하고 이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최근 한국 언론에는 우리도 이 기회에 미국의 관대한 자세를 본받아 민족주의를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민족주의가 편협성과 배타성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민족주의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폐쇄적이며 후진적인 것으로 사회발전에 큰 장애가 됨으로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곤란한 주장이다.

어떤 이는 심지어 미국의 너그러운 자세를 보니 5년 전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 우리가 범국민적으로 반미시위를 벌인 일이 부끄럽고 마음이 개운치 않다고 했는데 그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논리이다. 미선-효순 사건의 발생과 사후처리과정의 배경에는 한국의 인명을 경시하고 주권을 무시하는 미군당국의 부당한 고정관념이 있었지만 조승희 사건은 한국정부나 국민의 대미인식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전혀 무관하며 비대칭적인 두 사건을 대칭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민족주의’란 정치학적 개념은 18세기 이래 구라파에서 근대 민족국가의 생성과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발전되어 20세기에 들어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와 90년대 초 공산권 붕괴 중에 많은 신생국가의 탄생을 가져왔다. 또한 2차대전 후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 여러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한 것도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 진 일이었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영토확장과 국력증강을 기하면서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하여, 2차대전 후에는 민족주의를 버리고 국제주의로 나가야 한다는 이론이 대두되었다. 또 그동안 민족주의의 기치를 들고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이 대체로 후진국이란 점에서 마치 후진성이 민족주의의 본성인양 그릇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아울러 다국적기업과 전자통신시대의 개막으로 자본과 상품의 무제한적 세계진출을 꾀하는 서방진영에서 민족주의는 고식적이고 폐쇄적이라는 개념이 퍼지면서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민족은 당초에 식민제국들의 팽창지향적 민족주의에 희생되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민족주의를 정립하고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을 맞고 1948년 나라를 세웠다. 그 후 60년이 지나 남한은 이제 세계 11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됐다. 여러 나라들과 경제교류를 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길 만이 우리의 살길이라 한다. 그러니 편협한 민족주의를 버리고 세계주의 물결에 합류해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반세기 이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세계유일의 분단민족이다. 남한이 세계화 물결을 타고 아무리 경제발전을 했어도 남북이 분단돼 있는 한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은 파괴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룸으로써 오랫동안 훼손된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국제주의나 세계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다음에야 비로소 참뜻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세계화의 선봉에 서있다지만 미국은 nationalism(물론 미국인들은 이 말을 단순히 혈통만이 아니라, 언어, 문화, 종교, 가치관 및 이념 등을 포함한 보다 넓은 뜻으로 쓰지만)을 매우 강조하는 나라이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국기의 뜻과 건국이념 그리고 역대 대통령의 이름 및 50개주의 위치를 되풀이해서 암기하는 교육을 받는다. 미국의 국기(國伎)인 직업야구 경기 전에는 반드시 국기에 대해 경례하고 국가를 합창한다. 또 나라 일에 관한 모임에서는 반드시 ‘충성선서(Pledge of Allegiance)’를 복창하는 것이 미국이다.

미국인들이 이렇듯 미국적인 것을 꼭 지키면서, 그리고 그것을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 세계화를 부르짖는 것처럼, 우리도 망가진 우리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우리 고유의 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가꾸어나가면서 떳떳이 세계의 일원이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활웅 재미 칼럼니스트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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