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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활웅 재미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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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일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집권가능성을 우려하고 그 당의 대선주자들을 공박했는데 중앙선관위는 7일 이를 공무원의 중립의무를 규정한 선거법을 위반한 것으로 결론짓고 대통령에게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선거법 제9조의 모호성과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자기발언의 정당성을 주장함과 아울러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이 민주개혁을 방해하고 있다고 계속 몰아붙이고 있다.
노대통령은 직설적 언사로 자주 구설수에 오르고 있으며 그 덕에 참여정부의 인기는 바닥을 치고 있다. 이번에도 그는 법을 거스르지 않고도 그의 소신을 밝힐 수 있는 표현이 얼마든지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그의 타고 난 스타일인가보다.
그런데 언론은 이번 일을 단지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위반사건으로만 보고 있는 것일까? ‘독재자의 딸’이 한국의 지도자가 돼서는 곤란하다는 말은 노대통령이 해서 선거법위반이 됐지만 실은 정치권과 언론에서 진작 나왔어야 할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못한 것은 한국 정치와 언론의 의식수준이 아직 거기에 못 미쳤다는 의미일까?
우리는 주판은 잘 놓아도 장사는 밑지는 상인과 같다. 왜 그런가? 지식수준은 높지만 의식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교육제도 때문일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교육은 달달 외우는 교육이다. 즉 진학, 취직, 승진 또는 출세에 필요한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었다. 사물을 관찰하고 사고하고 판단하여 의식을 높이는 교육이 아니었다.
그런 교육은 우리 역사를 매우 그르쳤다. 해방 후 우리는 독립운동세력의 ‘의식’보다 친일반민족세력의 ‘지식’을 중용함으로써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 후 외국에서 민주주의를 공부했다는 정치학박사들은 군사정권에 빌붙어서 독재를 찬미했다. 히틀러, 프랑코, 파레비 등은 각기 자국의 경제발전을 이끌었어도 독재자라고 멸시받고 있는데 지금 한국에서는 경제를 일으켰다고(사실은 꼭 그런 것도 아닌데) 박정희가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힌다한다.
그런 현상을 배경으로 이제 ‘독재자의 딸’이 대권에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를 군사독재의 잔재인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사대예속, 반공반북, 분단고착화, 정경유착, 만성적 부패와 부조리 그리고 빈부격차를 특징으로 하는 유신독재의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인가?
물론 ‘독재자의 딸’은 ‘독재자 자신’이 아님으로 그에게 아비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또 ‘독재자의 딸’이 한 사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가 정치지도자를 자처하고 ‘한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독재자의 딸’은 그 아비의 엄청난 죄과를 똑바로 시인한 적이 없다. 또 그 아비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거나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손해를 입은 수많은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유감의 뜻도 제대로 한번 표시한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아비의 ‘치적’을 칭송하면서 그가 아비의 뜻을 계승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언론은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은 한국의 언론이 독재의 시녀노릇 했다고 비난했다. 꼭 적절한 지적은 아니나 그 말에 진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최근 모 언론인이 지적했듯이 ‘민주화 이후 기꺼이 한 정파의 일원이 돼 갈등생산과 전선형성을 선도해온 것이 바로 언론’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의식의 고양은 언론의 사명으로서 지식의 전파보다 더 큰 비중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언론은 ‘독재자의 딸’이 한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전 국민과 더불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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