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님과 기자놈


   
 
  ▲ 김세은 교수  
 
이십수년 전, 내가 고민 끝에 신문방송학과를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말렸다. 기자는 좋은 직업이 못된다는 것이었다. 기자가 되기보다는 언론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어쨌든 ‘기자놈들’과 가까이 해서 별로 좋을 게 없다고 탐탁지 않아 하셨다.

아무도 바깥세상에 대해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던 시절, 신문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어른들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내게 기자란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이 따라야 하는 무척이나 중요한, 그렇기에 충분히 존경할 만한 그런 직업이었다.

그런 내 생각에 대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힘든 일을 수행하지만 권력을 가까이 한다는 점에서, 또 크건 작건, 그 유형이 어떻든간에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자는 ‘나쁜 놈들’로 변질되기 쉽다. 실제 많은 기자들이 그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소명의식과 윤리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검사도 그렇고 경찰도, 교사도 일부는 마찬가지다….”

어디 나와 아버지 뿐이랴. 기자를 ‘기자님’과 ‘기자놈’으로 보는 두 관점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상존한다. 어느 직종인들 그렇지 않을까마는, 특히 기자라는 직업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묵묵히 애쓰는 다수가 비양심적인 소수로 인해 매도되기 십상이다. 사회 곳곳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성스러운 일이 ‘썩은 고기나 물러 다니는’ 수준으로 종종 격하되는 건 바로 그 소수 탓이다. 그래서 그 소수를 가려내려는 노력은 명분이 있다. 때로는 정치권력이 그 명분을 빌려 언론통제를 노리기도 했고 때로는 언론계 안에서 자정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면서, 진짜인 나와 사이비인 너를 가려내고 정통인 나와 조야한 너를 구별지었다.

‘노가다에 박봉’으로 일컬어지던 기자직이 고시급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인기직종으로 변화한 후에도 이러한 구분이 계속된다는 건 문제다. 슈메이커와 리즈의 <매스미디어 사회학>에 보면 미디어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로 기자 개인의 속성, 조직과 관행, 외적 영향, 이데올로기 등이 거론되는데, 한국 사회 기자들의 경우 몇몇 범주들이 좀더 강력하게 힘을 발휘해 나와 너를 구별짓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기자들의 피아 구분은 학연과 지연이라는 절대보편적 기준 더하기 진보와 보수, 신문과 방송, 전통매체와 인터넷, 중앙언론과 지방언론 등등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나아가 심리적 응집과 단절을 통해 무수한 파벌 만들기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기자 마음 속에 수많은 파벌이 형성되면 일관성도 문제가 되겠지만 어쨌거나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투명성과 공정성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건전한 상호비판과 견제를 넘어서 언론의 신뢰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언론에 대한 낮은 신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들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심지어 상당수 기자들조차도 신뢰할 만한 언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극단적 자기부정으로 보이는 이 사태는, 그러나 사실은 내가 아닌, 내 편이 아닌 언론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 해야 맞으며 따라서 한국 언론의 구별 짓기와 파당 만들기에 대한 자기고백으로 들린다. 내가 속한, 내 편의 일에 대해서는 작은 일도 크게 보도하면서 내가 속하지 않은, 내 편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몸을 사리는 경향이 기자들에게 분명히 있다. 최근 시사저널 사태 역시 대부분의 기자들은 내 일로 여기지 않았다.

발이 타들어가는 줄 모르고 내 발등의 불을 강 건너 불로 여기는 일들이 우리 사회 기자들에게는 너무나 많아보인다. 그러다가 일단 내가 속한 일이라고 여기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달려드는 모습은 민망하기조차 하다. 기자도 사람이고 세상 일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하지 말자. 권력과 금력에 휘둘리는 검찰과 경찰을 감시하고, 돈 받고 답안을 고치게 해주는 교사를 비판하려면 기자는 달라야 한다. 그래야 ‘기자님’인 것이다.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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