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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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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신문의 이상한 점은 모두가 권위지를 표방한다는 것이다. 대중지라는 타이틀을 기꺼워하지는 않더라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도대체가 모두가 정론지(正論紙)요 ‘최고의 신문’이다. 영국의 경우, 다양한 권위지와 중급지, 대중지들이 매일매일 천만이 넘는 독자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영국의 중급지와 대중지는 자기네 신문이 그렇게 분류되는 것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신문 시장의 세분화는 다양한 독자들을 신문이라는 매체로 끌어들이는 효과적 유인으로 기능한다. 물론 우리에겐 스포츠신문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편리를 가장한 공짜 선호는 무료신문을 창궐하게 만들었고, 스포츠신문의 쇠망을 이끌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온통 권위지 아니면 무료신문이다.
문화일보가 신정아(이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역겹다)의 누드 사진을 게재했다. 문화일보의 ‘성 로비’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별다른 후속기사나 물증이 제시되지 않고 있는 와중에, 온 나라가 언론의 선정성을 들먹이며 문화일보를 비판하느라 들썩이고 있다. 그만큼 개인의, 여성의 인권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가 성숙해진 것인가? ‘O양 비디오 사건’과 ‘백지영 비디오 사건’을 통한 학습효과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학습 속도는 참으로 빠르다. 그러나 우리가 언론의 선정성과 관련해서 흥분해야 할 대상이, 분을 내야 할 거리가 정작 이번 일뿐인가? 이번에도 우리 언론은 문화일보를 ‘타자’로 만드는 데 주력할 뿐, 언론의 이름으로 끌어안고 진지하게 반성하려는 기미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선정성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자극적인 기사 제목과 낯뜨거운 광고는 신문 지면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다.
각 ‘권위지’의 인터넷 사이트는 성인사이트와 경쟁하는 수준으로 노골적이다. 정치 기사를 클릭해도 왼쪽에는 “당신이 알고 싶은 러브 & 섹스 노하우”가 남녀 사진과 함께, 오른쪽에는 이른바 ‘건강캠페인’ 아래 “알콩달콩 구부러진 음경의 비애” “섹스파일 남성이 불륜을 꿈꾸는 이유”가 칼라옷까지 입고 버젓이 양 시야를 어지럽힌다.
기사 맨 아래에 이르면 어김없이 ‘성인유머’라는 박스 아래 “인간의 성적 욕망” “마스터즈 보고서-여성의 성적 욕망” “남자를 홀리는 능력의 소유자”가 자리하고 있다(9월 17일 현재). 페이지뷰 1, 2위를 다툰다고 자랑하는 다른 신문사도 마찬가지다. “마스터베이션 그 오해와 진실”까지 있다. 아이들 볼까 싶어 얼른 화면을 내려도, 이 사진들은 찰거머리처럼 따라온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아이들더러 신문을 보라고 할 것인가. 기가 찰 따름이다. 광고비를 도대체 얼마나 받기에! 신문의 미래? NIE? “입에 담기 민망하다.”
물론 이번 사건은 보도 윤리라는 측면에서 그 심각성의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돈벌이를 위해 ‘성(性)’을 파는 언론의 부정직함이다. 앞으로 근엄하고 뒤로는 별짓 다하는 우리네 모습과 그대로 닮았다. 우리는 대중지를 원한다. 나는 진실로 이 말을 하고 싶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독자로서, 벌거벗은 남녀의 사진과 야한 소설에 어쩔 수 없이 눈이 간다는 것을 인정하자. 신문사로서, 그렇게 하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자.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아닌 척 하고 살아왔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 참에 신문사들이여, 선택을 하라. 권위지냐 중급지냐 대중지냐. 일단 선택하고 나서는 그 본분에 맞는 지면을 충실하게 만들어내자. 권위지는 권위지답게, 중급지는 중급지답게, 대중지는 대중지답게, 딱 그만큼만 하자. 적어도 선정성에 있어서는 시비가 붙지 않도록, 확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중지를 허하라. 그러면 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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