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
김경준이 귀국했다. 이미 그를 ‘대선뇌관’으로 규정지은 지 오래인 우리 언론은, 그의 미소 띈 얼굴을 1면에 커다랗게 내고 관련 기사를 몇 면에 걸쳐 보도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 와중이다. 5년을 주기로 등장하는 이런 인물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우리 같은 일반 국민들은 정말 헷갈린다. 검찰이 무사공정, 신속하게 수사한다고?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이 나라에 몇 명이나 될 것인가.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이회창 씨는 김경준의 귀국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회창 씨는 두 번씩이나 속수무책으로 김대업에 당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이명박도 이번 공세를 견뎌내지 못하리라 판단한 듯 하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복잡다변의 정치공학 흐름 속에서 이른바 유리한 기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터, 일단 그 판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물불 안 가리고 출마를 요구하는 지지자들도 ‘인간적으로’ 외면하기 어렵지 않은가. 정치은퇴를 번복한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아무 문제없이 대통령도 되고 경선에서 승리도 하고, 다들 큰소리치면서 살지 않던가. 법과 원칙? 지킬수록 손해라는 한국 사회의 진리를 내가 왜 몰랐던가 하는 생각을 했음직도 하다.
이회창 씨를 보면서 <뉴욕 타임즈>가 생각났다. 권위지의 대명사로 세계 신문의 최고봉에 서있던 <뉴욕 타임즈>는 몇 년 전 소위 ‘블레어 사건’으로 크나큰 위기를 겪었는데, 이를 계기로 특별위원회를 구성, 조직 전반을 점검하면서 ‘우리의 저널리즘은 왜 실패했나’를 면밀하게 파헤쳤다. 신문사의 명성과 신뢰에 치명적일 수 있는 사건을 한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시스템의 문제로 인정할 줄 아는 그들의 자세는 과연 <뉴욕 타임즈>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들이 취한 것은 사건의 단순한 봉합이 아니라 문제의 소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들의 대안 중 ‘퍼블릭 에디터’라고 하는 옴부즈만이 돋보였다. 신문사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그 결정을 존중하고 승복할 만큼 두루 존경받는 ‘어른’을 모시고 그 의견에 따르는 것. 자존심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기자들이 자신의 업무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하는 소리를 듣기 좋아할 리 없다. 그러나 그런 불만을 잠재울 만한 능력과 권위를 지닌 어른을 옴부즈만으로 모심으로써, 저널리즘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뉴욕 타임즈>의 판단이었다.
2005년 신문법이 제정되면서 우리나라 일간지들도 옴부즈만을 두는 것이 의무조항으로 명기되었다(제1장 제6조 고충처리인). 그런데, 의무조항임에도 불구하고 옴부즈만을 둔 일간지는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설령 두었다고 해도 대부분이 형식적이어서, 옴부즈만이 있는지 없는지 독자는 물론 신문사 내부에서도 알지 못하며 심지어는 자신이 옴부즈만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옴부즈만으로서의 업무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진 예가 거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기자와 신문사는 스스로를 엄격히 모니터링해 줄 ‘어른’을 모시길 꺼려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지적하고 도덕적 해이를 감시하며 동시에 독자와의 통로가 되어줄 ‘어른’ 없이 신문을 만들어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회창 씨가 몰랐던 게 있다. 정치은퇴를 번복한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승리했을지언정 국민의 가슴에 불신의 상처를 깊게 남겨 놓는다는 사실, 환호하는 이들은 눈앞에 보이지만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대다수의 국민과 이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경제적으로 좀 나아졌을지언정 우리 사회의 신뢰는 아직도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조사결과에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책임감을 느껴야 할 명단에 이제 자신의 이름도 올랐다는 사실. 언론이건 정치건, 우리에게 ‘어른’이 되어줄 만한 그 누군가가 절실한, 그래서 그런지 더더욱 가슴이 허허로운 이 가을의 끝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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