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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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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언론은 매우 바쁘다. 부처 통폐합을 코앞에 둔 공무원 속내에야 비할까마는, 언론 환경을 둘러싼 각종 법안의 변경, 폐기 혹은 신설을 둘러싸고 저마다 눈치와 계산이 한창이다. 상이한 세계관을 표방하는 권력 교체를 앞두고 언론사마다 걱정 또는 기대의 폭과 깊이가 다를 테지만, 방송사는 방송사대로,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분주한 모습이다.
바쁘기는 학계도 마찬가지다. 전문가 집단으로서 나름의 특수를 누린다. 지난 연말부터 각종 언론 정책 세미나가 계속되고, 한가하던 세미나장에는 기자와 카메라들이 북적대고 있다. 누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어느 언론사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얘기를 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운 이들의 취재는 각사의 기준에 따른 ‘게이트키핑’을 거쳐 보도된다.
비록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대통령이 바뀌면 언론사 간 권력 구도 또한 바뀌는 것이 우리가 목격해온 그간의 한국 사회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정치화는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는지 모른다. 복잡하디 복잡한 권력 관계 속에서 언론사들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적극적 혹은 소극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특히 자의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권력 관계에 개입하는 언론사를 우리는 ‘언론 권력’이라는 명명 하에 바람직하지 않은 ‘공공의 적’으로 여기고 질타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언론사가 정치권력의 변동에 민감하다는 것 자체가 큰 흠이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정치권력이 언론사의 흥망성쇠에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그 와중에서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왕이면 폼 나게 살아남는 것이 낫기 때문에 이런저런 ‘오버’가 생기게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언론이 보여주는 지나친 정치 의존, 정치 집중은 냉소적 수용자를 양산해낼 뿐이다. 어느 언론사가 무슨 얘기를 할지 뻔하기에, 수용자는 더 이상 신문과 방송 뉴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공짜 포털과 무료신문 ‘서비스’도 있지 않은가.
서양에서 저널리즘이라는 장르가 합법의 영역에 들게 되는 것은 18세기 이후다. 그 이전에는 ‘파당적인 신랄함, 만연한 파벌주의, 조야한 취향, 개인적인 원한의 폐해’(Walter Graham)로 가득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편견, 욕설, 독단성, 재판관적인 어조, 전지전능하고 단호한 태도’(G. S. Marr) 역시 제대로 된 저널리즘 이전의 정기간행물에서 보이는 특징이었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 우리 언론의 수준은 어떠한가? 과연 당파성에서 자유롭다 할 언론사가 어디 있으며, 욕설에 가까운 독설과 수용자 위에 군림하는 전지전능한 태도로부터 멀다 할 언론사가 어디 있는가? 수용자가 원한다는 빌미 하에 오락이나 정보의 이름으로 조야한 취향을 드러내고, 원한의 수준에서 사회 현상을 해설하곤 했던 것이 바로 우리 언론의 모습 아닌가?
우리 언론이 아직까지 18세기 이전 서양의 정파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회의와 의구심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권력을 반기는 언론사는 권력의 감시와 비판이라는 저널리즘의 기본을 되새기고, 새로운 권력이 마뜩찮은 언론사는 자신의 의견이 독선이 아닌지 거듭 살필 일이다. 아울러, 수용자보다 정치권력의 구조 변동에 더 신경 쓰는 언론은 제발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다. 혼란스런 이 시대에 수용자가 진정 필요로 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발로 뛰며 고민하는 언론, 그리하여 불확실성의 시대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인생의 멘토로 삼을 수 있는 참다운 언론으로의 전환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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