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2월16일 동아일보에서 광고가 사라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비판에 앞장선 동아일보에 대해 상품광고를 싣지 말도록 기업에 압력을 가했다. 이른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시작된 것이다. 광고탄압 40여일이 지나자 동아일보 지면에는 상품광고가 모두 사라졌다. 동아일보 독자들은 백지 광고란에 의견광고를 채우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과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꼭 33년이 지난 요즘 한겨레 지면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신문광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이 한겨레에만 광고를 중단한지 석달째 됐다. 33년 전엔 정치권력이 광고를 이용해 언론을 탄압했다면, 지금은 자본권력이 언론의 숨통을 죄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삼성이 떠난 광고면에 의견광고를 게재하면서 삼성을 비난하고 나섰다.
한겨레는 지난해 11월부터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일가의 불법 비자금 조성과 로비 의혹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언론의 의무와 사명에 가장 충실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 뒤 삼성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유독 한겨레 지면에만 광고를 싣지 않고 있다.
신문사에 편집권이 있듯이 광고주에겐 광고집행 권한이 있다. 삼성이 한겨레에 광고를 싣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자유다. 한겨레도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 한겨레는 삼성의 광고거부에도 아랑곳없이 삼성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고 있다. 경영면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지난해에는 연말에 삼성 광고가 전혀 실리지 않았는데도 2000년 이후 최대 흑자도 이뤘다.
그런데 한겨레로서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삼성이 태안 기름유출에 대한 대국민 사과광고를 종합일간지와 경제신문, 영자신문 등에 모두 게재하면서 유독 한겨레에는 싣지 않았다. 상품광고도 아닌 사과광고조차 한겨레의 광고 집행을 거부한 것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과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등 언론단체들 지적처럼 한겨레 독자들은 삼성에게 사과를 받아낼 권리조차 박탈당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삼성은 한겨레 비판 기사에 대해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기사가 잘못됐다면서 정정을 요구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한겨레가 좀 심하지 않느냐며 대화를 요구한 적도 없다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한겨레 기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광고 집행을 거부한 것은 한마디로 기분 나쁘다는 치졸한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삼성의 한겨레 광고거부는 최고위층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실무진들은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삼성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한겨레는 심사숙고하면서 대응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김종구 편집국장이 한겨레 지면을 통해 밝힌 표현대로 “편집국장이 광고 문제까지 언급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면서도, 삼성의 광고거부 사태를 궁금해 하는 한겨레 독자들에게 사태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독자들에 대한 의무와 사명이기도 하다. 33년 전 동아일보 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겨레 독자들은 삼성이 떠난 빈자리에 한겨레 격려광고를 싣고 있다.
33년 전 동아일보는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에 굴복해 양심적인 기자들을 모두 해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한겨레 기자들은 쫓겨나지 않는다. 한겨레 기자들은 궁핍한 삶을 각오하고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삼성이 아무리 광고를 중단한다고 해도 한겨레 밥줄을 끊을 수 없는 이유다. 아울러 삼성은 이제라도 세계적인 기업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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