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을 위한 언론


   
 
  ▲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환율 덕을 보았다지만 어쨌든 국민소득 2만 달러가 열렸다. 소득이 올라가면 당연히 삶의 수준과 질도 높아져야 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외모는 한참 세련되어졌다. 이제 매무새만으로는 그 사람의 직업과 소득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좋게 말해 개성의 표현이지,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외모지상주의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돈벌이를 위해 ‘외모가 권력이다’를 외치는 언론과 기업의 작당은 우리 사회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먼저 겉모습을 가꾸는 데에 신경을 쓰도록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사람들의 행동양식은 그들이 성취한 외양의 수준을 따르지 못한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불룩한 주머니는 자신감을 주는 게 사실이다. 소득은 늘어갈지언정, 세상은 어둡고 무서워져만 간다. 이것은 역설이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각종 끔찍한 사건들이 며칠 간격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이 시대를 진단하는 것은 정말 간단치 않은 일이다. 양극화와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사하고 화려한 잔치가 벌어지는 그늘에서 우리 이웃의, 우리 자신의 힘겨운 삶이 팍팍하게 이어지고 있다.

공천을 둘러싸고 권력에서 밀리거나 밀어내거나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는 정치하는 사람들도 힘들 테지만, 무사안일 공무원의 뺑뺑이 돌리기로 기업하는 사람들도 힘들 테지만, 권력도 돈도 없이 살아가는 소시민들은 더, 더 많이 힘들고 벽이 높은 세상에서 그 힘든 삶을 호소할 데도 어디 마땅치 않다.

신문 보기가, 텔레비전 켜기가 두려운 요즘, 언론은 그에 대한 사실 보도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가, 개인이 스스로를 조용히 성찰하고 고민할 기회를 앞장서서 마련해야 한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힘겨운 삶들,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일을 언론이 해야 한다. 시청률과 구독률의 위력을 모르지 않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뜻함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더 나은 세상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것이 언론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지나친 이상주의적 발상인가.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정치권력의 필요에 의해 우리 언론은 곧잘 동원되곤 했다. 이제는 그것을 좀더 자발적으로, 좀더 실질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일부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긍정적인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을 좀더 많은 언론사들이 좀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해나가자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를 면밀히 관찰하고 짚어내며 다독이는 것에 언론이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가장 강력한 사회화 기관 중의 하나라는 것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언론은 한 사회가 이러저러한 틀을 갖추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언론이 곧 권력이라는 것은 단지 정치 과정에 개입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미시적으로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거시적으로 한 사회의 모습과 역사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함께 살아가는 시민들이 지녀야 할 덕목, 이제는 오로지 이기적 유전자만 대물림되는 곳인 가정은 물론 입시기관으로 전락한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덕목들을 언론이 일러주고 이끌어야 한다. 언론이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수행하는 세련된 사회화를, 사회통합을 기대해 본다.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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