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제대로 듣는 연습부터 해야


   
 
  ▲ 김국진 미디어미래연구소 소장  
 
시민의 도시를 야만의 도시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세상에 한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국민의 점잖은 의사표현이 이어졌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신문들이 시민들의 정중한 의사표시를 괴담에 부화뇌동하는 수준으로 폄하하고, 소위 제대로 몰라서 그런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심지어 저주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촛불집회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배후세력설에다 청소년의 무지론까지 있었다. 이러한 기간 중에 난무된 표현중 하나가 소위 ‘소통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 하나는 ‘과연 소통의 문제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연 소통을 위해 노력하였나 하는 것이다.

먼저 소통의 문제라고 하는 사람간에 ‘그 소통이 그 소통’이 아닌 것 같다. 소통(疏通)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의미하는데, 커뮤니케이션은 정의하는 사람만큼의 정의가 있지만, 크게 3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물리적으로 정보원으로부터 수용자(receiver)에게로 정보의 이동을 의미한다. 둘째, 정보원(source)이 설득을 목적으로 한다는 정보원 의도성을 추가하는 경우이고, 셋째는 수용자의 해독이나 선별적 반응 등 수용자 의미부여성을 추가하는 경우 등이다. 이중 물리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정보원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수용자의 의미부여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과거 PR론과 선전론이 한참이던 시절에는 전자의 정보원 의도와 설득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단방향의 미디어세상이 아닌 전방향의 미디어세상에서는 수용자의 의미부여 관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소위 소통의 문제가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이나 인식에서는 어느 것을 의미한 것인가? 아마도 주도적 입장에서 설득행위로서의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것도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만 알린다고 비유될만한 낮은 수준의 PR 수준은 아니었는지?

그런 인식이라면, 대한민국의 디지털 시민들과는 소통하기 정말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의 디지털시민은 이미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인당 소득이 비록 세계 51위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우리가 중위권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 살아보세의 개발경제시대도 살아 보았고, 군부독재시절도, 민주화 역사도 겪었다. 그리고 권위가 무너지던 시대에는 수평적 평등사회의 경험도 했으며 월드컵 4강을 통해서는 약소국가 한국이 아닌 위대한 대한민국의 자부도 경험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교육열에 정보욕구, 역동적 역사와 민족성을 지닌 국민들이다.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현실만족도가 떨어지고 그러기에 그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발전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국가이다.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오늘날의 국민을 과거의 단순히 설득대상으로서의 대중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국민을 상대로 한 소통이란, 철저히 신뢰에 바탕을 두지 아니하고는 안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연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앞서 언급하였듯이 축소, 폄하, 비난과 저주까지 적지 않은 언론이 보여준 모습이다. 그러한 점에서 언론들의 반성을 요구한다. 대의민주주의의 대표인 의회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비아냥거릴 때 시민들은 스스로 마이크와 카메라, 노트북을 들고 현장에서 오늘의 현상을 전달하고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활발한 토론을 이어간다. 21세기형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듣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듣고 이해하라는 식은 과거의 방식이다. 정부와 언론은 이제 제대로 듣는 연습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김국진 미디어미래연구소 소장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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