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고마저 신문사 논조와 같을 필요 없다

언론다시보기 / 박경철



   
   
생물 유전학에서는 동종교배보다 잡종교배가 자연도태에서 유리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한 개체에서 동종교배가 계속되면 각 개체는 유전적으로 서로 동일해지고, 그 개체군의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능력이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목격 할 수 있다. 70년대에 외국에서 들여온 황소개구리의 개체수가 최근 들어 갑자기 줄어들고 있는 현상도 이로서 설명되고, 동종 단백질 섭취에 의한 변형 프리온 단백질의 위협이 대두되고 있는 것도 맥락이 같다. 뿐만 아니다. 프랑스나 스페인 왕가의 몰락이나 일본 왕실의 빈약한 후사문제도 오래전부터 이들 가계에 존속했던 근친혼이 원인이었고, 심지어는 문화, 예술분야에서도 동종교배는 일상적인 진화보다 늘 새로운 사조의 혁명과 같은 충격으로 나타나곤 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사례를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등단’이라는 후진적 구조를 고수하고 있는 문단이나 음악 미술 등의 기타 예술분야에서도 이런 부작용은 아주 극심하며, 심지어 학계조차도 동종교배의 나쁜 전통을 끈끈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구문이다. 이중에서도 압권은 문단의 ‘등단’ 제도다. 기성작가, 그것도 심사위원에 이름 한자리 올릴 위치에 있는 작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문인이 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등단제도는 우리 문학을 식물상태로 몰고 간 주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은 굳이 필자가 지적하지 않아도 언론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독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탐사한 기사나 보도를 언론을 통해 자주 접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드는 한가지 생각은 ‘그렇다면 우리나라 언론은 과연 이종교배를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배’라는 것은 언론사 임직원의 학벌이나, 지역과 같은 기업 구조적인 부분은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언론사의 지면을 살펴보면 그 편향성이 도를 넘는다. 언론사는 기자나 데스크의 칼럼이나 사설등을 통한 고유의 논조가 있고, 편집이 있어 언론사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은 충분히 기사에 반영된다. 때문에 언론사의 ‘외고’마저 언론사의 논조와 같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면에 다른 목소리와 주장을 자주 실어 균형을 유지하고, 팽팽한 긴장을 담아내는 것이 독자나 언론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언론사의 외고는 자사의 논조와 같은 인물들의 목소리로 대부분 메워진다. 그것이야 말로 심각한 동종교배다. 이로서 지면에 유연성이 사라지고 강퍅하고 교조적인 자기주장만 반복된다. 이때 외고는 논조를 강화하는 들러리일 뿐 아무런 지적충격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점에서는 기고자들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소위 진보는 진보언론에, 보수는 보수언론에만 기고를 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마치 순결을 잃은 순례자처럼 호들갑을 떨어댄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다. 자고로 지식인이라면 자신이 틀린 소리를 해도 무조건 지지해 줄 대상이 아닌, 옳은 소리를 해도 비판과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독자들을 향해 소신을 들려주고 설득하는 것이 좀 더 지식인의 책무에 가깝다. 지식인이 박수소리 뒤에 숨어 편협한 주장만 펴려는 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주장과 주의가 난무한다. 이럴 때일수록 언론사와 기고자 모두 동종교배의 함정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지 모른다.


박경철 안동 신세계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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