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인터넷신문이 사는 법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프레시안 박인규 대표

중앙일간지 일변도의 언론시장에서 대안언론을 꿈꾸며 창간했던 인터넷신문은 어느덧 10주년을 훌쩍 넘겼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존 언론과 대등하게, 가끔은 이들을 뛰어넘는 파급력을 보여줬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 프레시안 박인규를 대표를 만나 지난 10년을 되돌아 봤다.



   
 
  ▲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  
 
미디어계의 애플을 꿈꾼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


서울 광화문 뒷골목, 좁디좁은 사무실에 기자 4명이 모여 앉았다. 월간 말지 기자 오연호가 창간한 매체, 이름도 성격도 생소한 ‘오마이뉴스’는 2000년 2월에 탄생했다. “단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다”는 오연호 대표의 말처럼 오마이뉴스의 초기는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2002년 대선, 오마이뉴스는 당시 노무현 후보를 비롯한 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려 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불허했다. 50여명의 선관위원은 건물 1층 출입구와 로비, 5층 사무실을 봉쇄했다. 노 후보가 간청해도 소용이 없었다. 신문법상 인터넷신문은 언론이 아니었다.

기존 언론과 제도의 벽을 실감했다. “바뀌어야겠구나. 반드시 바뀌어야겠구나.” 일인시위를 했다. 헌법재판소에 호소도 했다. 인터넷신문은 비로소 신문법에서 보장받는 언론이 되었다.

2012년 3월, 광화문 뒷골목에서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18층으로 옮긴 사무실에 직원은 이제 100명을 훌쩍 넘겼다. 뉴스 스튜디오에선 민주통합당 총선 예비후보 초청토론회를 열어 생중계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는 모토의 중심에 있는 시민기자들은 350권이 넘는 단행본을 발간했다. 팟캐스트 후발주자 ‘이슈 털어주는 남자’(진행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2위에 오를 만큼 뉴미디어 부문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면의 제한에서 벗어나자”는 모토는 적중했다. 지난해 9월, 서울대 안철수 교수가 오마이뉴스를 만났다. 안철수 교수는 물었다. “왜 오마이뉴스여야 되나.” 오연호 대표는 답했다. “무한대로 실어주겠다. 당신의 진심은 무엇인가.”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는 7개의 기사로 나뉘었다. 그리고 안철수는 순식간에 대선후보로 등극했다.

노무현, 문국현, 조국, 안철수에 이르기까지. 오마이뉴스가 ‘킹메이커’ 역할을 하려 한다는 언론계의 곱지 않은 시선도 존재한다. “기자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안만 주목할 건 아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대중의 가슴 속에 어떤 인물이 있는지 읽어야 한다. 안철수가 정치를 하지 않았지만 정치를 한다면 어떨까. 내 생각은 거기에서 출발했다.”

오 대표는 다시 꿈꾼다. ‘2020 플랜’을 세웠다. 유료독자 4229명을 기록한 ‘10만인 클럽’을 강화한다. 시민기자를 양성해 온 ‘오마이스쿨’의 교육사업은 온라인으로 확대한다. 지난해 6권의 책을 출간한 ‘오마이북스’는 올해 13권의 책을 출간한다. 기자들에게 통일을 비롯해 양극화 해소, 환경 등 향후 100년의 거시적인 담론을 준비하라는 주문도 했다.

“진보는 불쌍하니까 도와줘야 한다? 그것은 한계가 있다. 진보언론이 충분히 사야 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애플의 아이폰처럼 사고 싶은 언론을 만드는 게 목표다.”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진보언론, 오연호 대표의 새로운 실험이다.





   
 
  ▲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  
 
새로운 상상력으로 도전한다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


“어낼러시스 앤드 코멘터리”(Analysis & Commentary)
분석과 논평. 박인규 대표는 프레시안의 정체성을 압축해 설명했다. 정치평론과 깊이 있는 기사를 원동력으로 ‘관점이 있는 뉴스’를 표방해 온 프레시안. “전문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우리만의 시각을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자”며 2001년 9월, 창간했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 참여정부가 추진한 한·미 FTA의 문제점, 삼성 김용철 전 법무팀장의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 폭로, 천안함 사태,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사망 의혹까지. 프레시안은 권력과 자본의 환부를 조목조목 짚어냈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거대 자본에 맞서 소수자의 편에 서는 일이었다. 진보언론인 경향신문조차 삼성을 비판한 칼럼을 누락했을 정도로 자본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 때문에 프레시안의 존재 이유는 더욱 커졌다.

삼성의 지배구조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한성대 김상조 교수(무역학)는 프레시안 10주년 기고에서 “고마운 매체”라고 밝혔다. “필자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주제로, 쓰고 싶은 양만큼 언제나 쓸 수 있는 매체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글 중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프레시안에 쓰는 것이 즐겁고 고맙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한·미 FTA도 그랬다. “2006년 2월, 공청회를 할 때부터 1년 넘게 비판을 제기했다. 당시 청와대에서 너무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몇 달 있다가 평균가격의 5배 가까이 되는 FTA 광고 제안이 들어왔다. 매수의 느낌이 강했다. 신입기자는 울며불며 반대했다. 결국 싣지 않았다.”

박인규 대표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광고 압박이 들어오면 기사쓰기도, 경영하기도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제3의 주인이 되어주세요’라는 구독운동인 ‘프레시앙’은 그렇게 시작됐다. 2000명의 자발적 구독료 지급자인 프레시앙들은 버팀목이 돼 왔다. 이제는 이들에게 무료강연과 같은 혜택으로 보답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수익확보를 위해 글쓰기 학교, 인문학습원과 같은 교육사업도 시작했다. 글쓰기 학교에서는 금융위기 이후 대두되고 있는 마르크스와 헤겔과 같은 유럽근대철학사 등 철학과 인문학을 강의한다. 인문학습원에서는 여행과 인문학적 이야기가 결합된 프로그램도 매달 선보인다.

“경영과 편집의 분리? 말은 좋은데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외부와 타협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인터넷 매체의 장점을 일간지들이 많이 흡수했고, SNS가 가져간 대안매체로서의 위기도 있다. 새로운 문제제기,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대안매체로서의 정체성, 프레시안의 도전은 다시 시작됐다. 원성윤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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