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인가 종북인가, 근거를 제시해야

[언론다시보기] 변상욱 CBS 대기자


   
 
  ▲ 변상욱 CBS 대기자  
 
머피의 법칙은 ‘일이 잘못되려고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평소에는 찾아도 보이지 않던 기자들이 일이 잘못되면 벌떼처럼 달려든다는 것도 머피의 법칙 중 하나로 넣을 수 있다. 통합진보당이 최근 겪고 있는 고충이 그런 것이다. 고충이 많기로는 통합진보당으로 몰려든 취재기자들도 다르지 않다. 평소 지속적으로 밀착 취재했거나 관련 정보가 축적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통합진보당의 권력구조와 이면에 몸을 감춘 실세들, 그들의 출신과 성장 내역을 느닷없이 연일 기사로 써내 지면을 메우려니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언론 보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정체성에 대해 명확히 정리가 되지 않는다.

‘진보는 죽었다’, ‘반민주적 폭력’…. 이 정도 선에서 비판한 언론은 진보진영에 대해 안타까움을 갖고 통합진보당이 공당으로서의 신뢰를 잃었음을 성토하고 있는 듯하다.

당권파에 훨씬 더 비판적이면서 진보진영 전체를 끌고 들어가려는 언론도 있다. 이런 언론들은 ‘수구진보’, ‘수구좌파’라는 낯선 신조어를 만들어 붙이거나 ‘폭력진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아예 ‘주사파 진보’라고 색깔론을 도입한 보도도 있다. 사설 제목을 ‘진보당 종북 사교 집단의 광기’로 뽑은 신문도 있다.

‘반민주적’, ‘수구적’, ‘주사파 종북’…. 통합진보당 당권파에 대한 서로 다른 이 3개의 표현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이는 결국 독자와 시청자들이다. 수구적이어서 반민주적 행태를 보인다는 것인지, 주사파 종북집단이니 수구적이고 반민주적인 것인지, 아니면 반민주적인 행태일 뿐 ‘수구’나 ‘주사·종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인지 언론 보도에는 단정만 있을 뿐 명확한 설명이 없다.

뉴스는 독자와 시청자가 접하지 못하는 외부의 인물과 현상, 쟁점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알려주어야 한다. 통합진보당의 당권파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과거의 활동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어디로 이 사태를 끌고 갈 것인지 더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각각 ‘수구’, ‘반민주’, ‘종북’, ‘주사’로 규정한다는 설명이 필요하다.

과거 게이트 키퍼로서의 언론은 전적으로 언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결정해 시민에게 통보했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초고속정보통신과 시민저널리즘이 갖춰진 21세기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일방적인 가치판단과 결정은 시대착오이다. 언론사가 수행하는 저널리즘은 시민들이 나서서 검색하고 조사하고 파헤쳐 정보를 나누는 커다란 저널리즘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언론사 저널리즘은 시민저널리즘의 파트너로서 이전과는 다른 역할이 필요하다. 21세기의 언론사 기자는 ‘시민이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라고 정의 내려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다. 독자나 시청자에게 퍼부어지는 숱한 정보들에 하나를 더 하는 역할로 그쳐서는 안 된다. 독자나 시청자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양질의 정보를 골라내고 정리해 질서있게 배열함으로써 자신의 인식체계를 구축해 가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분석 기사나 해설 기사와도 다르다. 쏟아지는 정보 중에서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 여러 해석과 판단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실체에 접근한 것인지를 가려내 일러주어야 한다. 통합진보당 폭력 사태의 핵심세력이 단순히 폭력적인 것인지, 수구세력화한 것인지, 그보다 심각한 주사파인지 사실적 자료와 판단의 근거를 내놓으며 명확히 해야 한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19대 국회는 주사파의 원내 진출이라는 논란 속에서 오랜 시간 겉돌고 시시때때로 색깔론에 많은 노력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작업은 주사파로 몰아간 언론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론들에도 주어지는 과제이다.

시민들을 흥분하는 군중으로 만드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니다. 사려 깊게 살피고 근거를 놓고 스스로 판단하는 시민 저널리즘을 지원하는 역할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21세기의 시민저널리즘은 사라지지 않지만 언론사 저널리즘은 얼마든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변상욱 CBS 대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