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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김주정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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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김주정 선임기자가 지난 15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0세. 고인은 1988년 광주일보 편집국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경제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같은 회사 후배인 박지경 정치부 차장의 추도사를 싣는다.주정형….
이제는 메아리로만 돌아오는 형 이름을 부르며…, 잠시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눈물에 묻혀 아련하기만 한 형과의 기억들…. 언제부턴가 제가 형의 아끼는 후배라는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 우쭐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형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1994년 4월 말, 막 수습을 마치고 특집부 ‘관광·레저·교통’ 담당 기자로 발령을 받으면서였습니다. 당시 형은 서울에서 국회 출입을 하다가 막 광주로 내려와 특집부에서 ‘뉴미디어·인터넷’ 담당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경제부·사회부·정치부 등에서 7~8년 정도를 형과 같은 부서에서 생활했습니다. 형이 ‘사건캡’이었을 때는 바이스캡으로, 노조위원장이었을 때는 사무국장을 맡아 모시기도 했지요.
형은 저에게, 아니 후배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지요. 그 중 시대를 앞서는 감각은 탁월했습니다. 원고지로 기사를 쓰던 1994년, 형은 광주일보 홈페이지 만들기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관심 두지 않던 때에 형은 지역의 작은 인터넷 업체와 손을 잡고 광주일보 홈페이지를 만들어냈습니다. 현재 광주일보 홈페이지 주소인 ‘kwangju.co.kr’는 이때 등록된 것이지요. 워낙 대표적 주소여서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회사 차지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오로지 형의 앞서간 감각이 빚어낸 작품이죠.
형은 항상 깨어 있는 의식과 예상을 뒤엎는 발상으로 후배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취재 보고를 하면서, 또 술을 마시면서 토론을 할 때마다, 저는 형의 지적에 항상 부족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어쩌면 저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까’, ‘왜 나는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항상 따라다녔지요.
형의 성실함과 인간성은 많은 후배들의 귀감이 됐습니다. 형이 광주 북부서를 출입했을 때, 타사의 한 수습기자는 형의 귀가를 지켜본 후 퇴근할 정도였다고 하지요. 자기 회사 선배가 매일 낙종을 하는데도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그랬다고 하더군요.
90년대 당시 대학생들의 화염병 공격에 치를 떨었던 안기부 학원 담당 직원은 형에게 “제발, 1분 전에라도 알려달라”고 하소연을 했다지요. 당시 광주일보에는 안기부에 대한 화염병 공격사진이 항상 실렸으니까요. 운동권 후배와도 인간적으로 얼마나 깊게 교류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었지요.
후배들은 어느 선배보다도 훌륭한 기자로 형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형을 놓아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아직도 형만 생각하면 눈물이 마르지 않아요.
형의 마지막 모습…. 앙상하게 뼈만 남은 상태에서도 칼럼을 쓰기 위해 고민을 하던 형, 몸을 뒤척이기도 힘든 상태에서도 글을 쓰고 싶어서 아이패드 사양을 물어보던 형, 전화로 말하기가 힘들어 ‘카톡’으로 선거 취재를 조언하던 형, 딸 현경이를 걱정하면서도 쉬이 부탁을 못했던 형….
형! 이제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하는지, 그 앞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제 모두 비우고 편안히 가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오랜 기간 형을 모실 수 있게 해줘서…. 행복하십시오. 저 세상에서라도…. 가시는 길에 평안과 행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광주일보 박지경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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