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피해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관성은 여전했지만, 이를 넘어서 한 발짝 나아갔다. 가수 정준영의 성관계 불법촬영·유포 사건에서 보여준 언론의 보도태도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해자를 부각시키는 과거의 보도행태를 답습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외부의 감시와 비판을 수용하고 자정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채널A는 정준영 사건을 보도하면서 ‘단독’이란 타이틀을 달고 피해자를 언급하며 특정 여성 연예인을 추론할 수 있는 방송화면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 동아일보 역시 채널A가 보도한 피해자를 파악할 수 있는 주변 정보를 그대로 썼다. 아주경제는 피해자로 거론되는 여성 연예인 이름을 직접 언급하며 클릭수를 유도하는 자극적 제목의 기사를 유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보도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내부적으로 채널A 기자협회에서 문제제기도 있었다. 결국 해당 기사는 삭제되고 채널A는 다음날 방송에서 시청자에게 공식 사과하는 멘트를 내보냈다. 기사 삭제와 사과방송이라는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동안 언론은 성폭력 사건을 보도할 때 관성적으로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보도를 해왔다. 성폭력 범죄를 비롯한 여성 대상 범죄를 보도할 때 선정적으로 보도하거나, 가해자보다는 피해 여성의 신원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OO녀 사건’이라고 제목을 짓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해 성폭력을 공론화한 ‘미투 운동’이 사회 각계에서 벌어지면서 언론의 보도 태도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 페미니즘 이슈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된 ‘강남역 살인사건’ 또한 최초 언론이 이를 ‘강남역 화장실녀’로 부르면서 여성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정준영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구태를 답습한 일부 언론의 보도에도 불구하고, MBC의 경우 ‘피해자를 궁금해하지 말라’는 주제의 리포트를 집중적으로 내보냈고, 주요 언론에서 피해자를 언급하는 대신 정준영의 행위의 불법성에 초점을 맞춰 어떤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 강조하는 기사도 많이 내보냈다.


이는 그동안 여성들의 문제제기로 불법촬영, 성폭력이 주요한 범죄로 인식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 사건이 터진 직후 인터넷에 피해자 명단이 나돌고, 포털 검색어에 ‘정준영 동영상’이 상위에 올라가기도 했지만, SNS를 중심으로 “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습니다”라는 포스터가 널리 공유되며 2차 피해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확산됐다. 비로소 우리 사회가 성폭력 사건을 대할 때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한국 언론은 성폭력 사건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다. 미투 운동으로 언론에 의한 2차 피해사례가 이어지자,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 등은 지난해 ‘성폭력·성희롱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을 발간하고 언론은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될 수 있는 이름, 나이, 주소 등의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도록 명시해 놓았다.


버닝썬 사건은 가수 승리, 정준영의 불법행위를 넘어 경찰과의 유착이 드러나며 권력형 사건으로 확대되고 있다. 아울러 부실수사로 흐지부지됐던 김학의 전 차관, 장자연 사건도 문재인 대통령이 철저수사를 지시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이참에 권력을 도구삼아 여성의 몸을 물건 취급하고 성적으로 착취하는 불법행위의 실체가 명백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언론도 성폭력 사건을 보도할 때 ‘가해자의 범죄행위’에 초점을 맞춘 보도태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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