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거듭할수록 ‘기술’이 늘어갔다. “너무 많이 알면 기사를 못 쓴다”하여 적당히(혹은 적절히) 취재하는 법을 터득했고, “케이스 3개만 모으면 기사가 된다”하여 리드 먼저 써두고 취재원에게 전화 걸어 ‘이건 이래서 이런 거죠?’라고 묻는 일이 잦아졌다. 형용사와 부사를 재소환할 일이 없지는 않았다. 주로 르포를 쓸 때는 “감동 팍! 눈물 찍!”이라는 데스크의 지시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나간 기사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생동감 넘치는 기사네요”, 아니면 “그냥 소설을 써라.” 내게도 수습 후배가 맡겨졌다. 배운 그대로 가르쳤다. 형용사와 부사를 들어내고 역피라미드를 쌓게 했다. 똘똘한 후배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살을 깨끗하게 바른 생선 뼈 같은 기사를 들고 왔다. “넌 벌써 사람이 되었구나”라고 칭찬했는데, 문득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 친구는 재기발랄한 글을 쓰던 친구였다. 내가 이 친구의 개성을 제거해버렸나? 내가 그랬듯이.
종종 뉴욕타임스나 이코노미스트 같은 영미권 언론의 기사를 언급하며 “우리나라 기자들은 이렇게 못 쓰냐”는 힐난을 듣곤 한다. 주로 형식과 분량에서 자유로운 피처 기사이긴 한데, 잘 쓴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실력’의 배경도 조금은 알 것 같다. 대학 시절 미국인 교수가 강의하는 영문과 ‘라이팅’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법은 물론 접속사와 문단의 구성까지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개인적으로 대학 가기 전,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글쓰기 학습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더 충격적이고 더 감동적이었다. 요즘은 글쓰기를 제대로 가르칠까?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아이들 글쓰기 교육은 대부분 영어 작문 수업이다. 조금 더 자라면 논술 점수 잘 받는 법을 배우고, 더 나이 들어서는 자기소개서 쓰는 기술을 배우는 게 거의 전부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소셜미디어가 유행하면서 가장 먼저 사진가들이 충격을 받았다. 사진은 아무나 찍는 것이 됐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퍼블리싱’할 수 있다. 진짜 ‘프로’만 살아남는 직역이 됐다. 글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어떠한가. 오마이뉴스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고 선언했는데, 그 선언은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에서, 유튜브에서 완성되고 있다. 대충 써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글쓰기부터 프로가 돼야 한다. 그 전에 형해화된 글쓰기 관성부터 벗어야 한다. 신문을 보면서 ‘이건 정말 잘 썼네. 누구지?’라며 바이라인을 뒤져볼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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