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이 예상대로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짧으면 몇 년, 길면 한 세대가 지나야 공개되곤 했던 백악관 웨스트윙의 의사결정 과정을 ‘폭로’ 형식으로 기술한 책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미국 국내적으론 당장 11월 초로 다가온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다른 나라들로서도 수퍼파워 미국이 트럼프 시대 들어 좌충우돌했던 모습을 내부자 시각을 빌어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존 볼턴’이란 인물이 누구인지부터 짚어보자. 네오콘의 주축인 그는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당시의 외교안보라인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다시 백악관에 기용된 된 그는 ‘북한 선 비핵화’와 ‘최대의 압박’이 대북 문제의 해법이란 입장을 유지했다. 민간인 신분일 땐 보수매체인 폭스뉴스의 평론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생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볼턴은 원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그의 회고록도 자신의 보수적 시각에 기초해있다는 말이다.
트럼프는 어떠한가. 충동적이며 자신의 이익만 따라 움직이던 부동산 사업가가 어느 날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이야기가 새삼스럽지 않다. 여기에 빈약한 인재풀, 참모들의 식견 부족에 경험 부족까지 더해져 백악관이 분열했다는 내용도 마이클 울프의 ‘화염과 분노’,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 ‘콜 사인 카오스’로 널리 알려졌다. 해외에 주둔한 미군 철수를 방 빼는 일처럼 쉽게 말하고 방위비 분담금을 몇 배 올려달라, 방세 올리듯 이야기하는 그에게 국제 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기대하는 이는 적다.
그런데 지난주 국내 언론들이 볼턴의 회고록을 다룬 방식이 의아하다.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나 취재 경험이 있는 기자들이라면 볼턴과 트럼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볼턴이 주관적으로 기술한 내용 일부를 거의 받아쓰기 형태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모 매체는 볼턴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조현병적 아이디어’라 평가한 부분을 크게 부각했다. 청와대가 볼턴의 회고록 내용을 적극 반박한 이튿날, 일부 매체들은 수퍼 매파의 시각으로 굴절된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거냐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볼턴의 회고록 내용으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야당, 볼턴을 ‘허접한 매파’라 비난해놓곤 또 ‘회고록을 통해 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썼는지 알 수 있다’고 평한 여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 역시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아전인수식 인용과 해석을 내놓았다.
볼턴의 회고록 전체가 팩트를 담고 있지 않더라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가 백악관 내부에서 북핵 협상 과정을 관찰한 사람임이 분명하고, 미국 외교의 깊숙하고 내밀한 모습을 보여준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무엇을 했어야 했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회고록이 묘사한 상황을 분석하고 맥락이 어땠는지, 어떤 의미인지 짚어야 했다. 볼턴식 프레임, 여기에 감정적으로 반응한 청와대의 굴절된 시각을 걷어내고 최대한 팩트를 재구성했어야 했다. 회고록을 상대 진영 비판에만 이용할 게 아니라 지난 북핵 외교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활용함은 물론, 그러지 못한 정치권을 비판했어야 했다. 영문을 하루 이틀 먼저 번역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 아니라면 말이다. 국내 언론이 앞 다투어 보도한 시점과 거의 동시에 회고록 해적판이 온라인으로 공개됐다. 기자들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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