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우 선생 미망인의 꿈
"남편 유고집 내는 것이 소원"…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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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천관우 선생의 미망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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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천관우 선생의 미망인이 충청도 충주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있다.
최정옥 여사(78)는 기자에게 ‘남편인 천관우 선생에게 누가 될 기사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받아 낸 후 취재와 인터뷰를 허락했다.
최 여사는 현재 동 사무소에서 나오는 월30만원의 생활비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일본에 거주중인 수양딸이 사업에 실패해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최 여사는 “남편이 사람과 술을 좋아해 늘 집에 손님으로 북적북적 했다”며 언론계 선배인 천 선생께 세배를 왔던 ‘후배기자’ 선우 휘 씨가 자신의 나이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어색해 했던 일, 70년대 거의 매일 찾아와 삶은 달걀을 한판씩 먹고 가던 ‘동아투위’ 사람들, 자꾸 찾아와서 나중에 주례까지 서 준 ‘정동영 학생’에 대한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최 여사는 80년 신군부 등장 후 천 선생이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자 집으로 찾아오던 재야인사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것을 특히 가슴 아파했다.
최 여사는 “전두환과 독대를 하고 ‘7년 단임’을 꼭 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서 입을 다문 것인데 사람들은 ‘천관우가 돈 받았다’고 오해했다”며 “남편은 사람들이 뒤에 쉽게 이야기한 것처럼 암이나 술로 죽은 것이 아니고 주위의 ‘비난화살’에 괴로워하다 죽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작년 10월 노환으로 쓰러져 1달간 병원에 입원을 한 후 기력이 쇄해 천 선생의 묘소에도 1년 가까이 가보지 못했다는 최 여사는 “남편이 ‘죽은 후 1년 내에 글과 스크랩 해 놓은 것을 출판해 달라’고 당부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와 관련된 원고만 큰 종이상자로 4상자가 넘는 분량인데 그 중 일부만 오는 8월 하순에 지인들의 도움으로 ‘해방 20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 여사는 또 “천 선생이 생전에 언론인으로 쓴 2권 분량의 스크랩북이 있었는데 자료를 보관했던 분이 얼마 전 ‘찾기가 힘들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며 “분실한 스크랩북을 찾아 남편이 남긴 글을 책으로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밝혔다.
<천관우(千寬宇 1925∼1991)>
언론인 겸 사학자. 51년 ‘대한통신’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투신하여 한국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편집국장을 지냈다. 1963년부터 71년까지 동아일보 편집국장·주필·이사를 역임했다.
동아시절 박정희 군사정권하의 척박한 언론환경 속에서 후배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고 ‘동아투위’ 활동 초기에 정신적인 지주로 7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5공 때인 1982년부터 91년까지 국정자문위원과 국사편찬위원을 지냈다.
손봉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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