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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이에 위치한 호치민 역사박물관. 호치민의 근검절약과 대중을 향한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2번째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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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 기자협회의 교류는 양국의 수교와 함께 시작해 이제 10년을 넘어섰다. 나는 이번 베트남 방문이 처음인 탓에 이처럼 오랜 양국 기자협회간 교류사실을 출국 직전까지 몰랐었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방문은 다소 설레었다. 처음 가보는 외국에 대한 궁금증도 한몫을 했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베트남의 현대사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욱이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고 결국 승리했다는 것 자체가 왠지 모를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베트남은 이제 우리나라와는 무비자 협정이 체결돼 있다. 우리 일행도 비자 없이 하노이 공항에 입국할 수 있었다. 끈적끈적한 날씨 속에서도 어디서든 담배를 피워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공항 밖으로 나오며 담배를 꺼버렸다. 무수히 늘어선 오토바이와 자동차의 매연은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금새라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대기환경은 좋지 못했지만 기자협회 관계자는 물론 식당이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다. 베트남 기협 간부는 한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몇 십 년은 뒤진 것 같다고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몇 년 전 우리에게도 이처럼 따뜻함이 있었을까 하는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하노이의 최대 관광지는 호치민 역사박물관이었다.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인 호치민이 죽기 직전까지 살았던 집이 있고, 낚시를 즐겼던 연못이 있고 묘소가 있었다. 호치민의 근검절약과 대중을 향한 사랑도 오롯이 남아있었다. 특히 권력을 장악하기보다는 권력을 나눠준 전통은 베트남의 집단지도체제로 통일을 가능케 했다는 설명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지난 10월 호치민 묘소를 참배한 사실이 꽤나 많은 베트남인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을 과거 미국을 도와 참전한 나라라기보다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며 아직도 분단된 아픔을 갖고 있는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한 기협 간부는 만찬장에서 “남북한은 꼭 평화적으로 통일됐으면 한다”며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하노이시의 한복판에 위치한 교도소는 역사 교육장이었다. 우리의 서대문 교도소에 비교 할만 한데, 베트남의 개혁·개방을 부르짖은 도이모이 전 서기장도 이 교도소에서 복역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며 숱한 독립투사들이 갇혀지내며 고초를 겪은 곳이었다. 미국과의 전쟁 동안에는 미군포로들을 수용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낯익은 존 메케인 의원도 이곳에서 포로로 잡혀있다 석방됐었다. 베트남의 사회 지도층은 바로 이 같은 고초를 겪은 독립투사의 자녀들이었고, 현 베트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베트남에 주재하고 있는 한 외교부 관리는 베트남의 과거사 청산을 예로 들며 “우리에게도 과거사 진상규명이 꼭 필요하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우리가 관광다운 관광을 한 것은 하롱베이와 천향사(千香寺). 하롱베이는 하노이에서 4시간 가까이 차로 달리면 다다를 수 있는 해변이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바다 곳곳에 솟아있는 기암절벽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아름다웠다. 베트남은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 속에 곳곳에 호텔을 짓고 길을 넓히고 있었다. 반면 송다이는 하노이에서 2시간 가까이 달리면 도착하는 하타이 성의 조그만 강이다. 송다이를 조그만 배로 거슬러 올라가면 천향사(千香寺)가 나온다.
17세기에 지어졌다니 4백년이 가까이 된 고찰인데,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인 베트남 불교를 통합시킨 사찰이었다. 맨발로 우리를 안내하며 설명해주는 젊은 스님에게서 외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베트남의 자존과 힘이 느껴졌다.
우리가 귀국하던 날은 타이거컵 결승전이 있었다. 베트남과 싱가포르가 맞붙었는데, 베트남 사람들의 축구사랑은 남달랐다. 우리 일행은 8박9일간의 길지만 길지 않은 베트남 방문 속에 양국 국민간의 동질감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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