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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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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공과론’이 드세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대표적이다. “과거 젊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동병상련이라고 봐야 하나? 과거에 대한, 그것도 지독히 개인적인 편견으로 색칠된 기억을 갖고 현재에 대해 훈수하고, 미래에 관해 조언한다.
문제는 철저히 사적인 그의 생각이 이를 단순 되풀이하는 신문, 방송에 의해 공적 언술로 포장되는 과정이다. 최소한 2천만 명 이상 보통사람들의 공분보다 이 회장이라는 권력자의 한마디가 더 위력을 떨치는 서글픈 현실이 문제다. 사적 발언에 의한 공적 토론의 제거. 진실의 규명, 모순의 해소 노력은 이런 애매한 기억과 모호한 정서의 기술에 의해 봉쇄된다. 법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이 애매한 ‘국민정서의 문제’와 ‘인물 공과론’으로 치환된다. 단단한 각질의 범죄 행위가 말랑말랑한 내용의 드라마로 뒤바뀐다.
‘큰 집 허문 김우중의 자전거 인생’이라는 <중앙일보> 칼럼의 경우, “국민은 각자 제 할 일 하면 그 만”인 관객으로 내몰기까지 한다. 정말 부끄러운 담론 실패의 증거다. 이것뿐인가? 주류 매체의 좀 더 나은 공적인 언어는 과연 불가능한가? 외국의 주류매체는 김우중 사건을 대체 어떠한 언어로 현실화시키고 있을까? 차라리 이렇게 바깥으로 나가보는 게, 언어의 혼란과 그에 따른 현실감각의 혼돈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한 때 잘 나가던 한국 실업계의 거물이 귀국하자마자 검찰에 체포되었다는 스트레이트 기사가 대부분이다. 19일자 가장 최근의 로이터 통신의 경우, 전설적인 대우그룹 창립자가 어떻게 사기 피의자로 전락했는지를 담백하게 그려낸다. 대우의 몰락으로 일자리 잃은 수백 명이 귀국 날 현장에 나와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고 보도한 후, 기사는 그가 사기와 횡령죄로 곧 고발될 거고, 유죄가 입증되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이라고 결론 맺었다. 여타 주류 매체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칼럼이나 사설의 경우 는, 수적으로 매우 드문 게 특색이다. 해외로 도피한 경제사범이 귀국해 처벌을 받는 게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일까? 사태의 본질과 아무 상관없는, 김우중 신변에 관한 개인적 감정이 번설한 잡사만 늘어놓는 국내 보수신문들과 크게 대비된다.
이런 점에서 90년대 말 ‘IMF 위기’를 최초로 예측 보도한 불룸버그의 한 칼럼이 주목을 끈다. 이 통신사의 고정 칼럼니스트는 거품경제의 장본인인 김 회장에게 어떤 관용도 보이지 않는 게 바로 아시아 3위 경제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단언한다. 만약 김씨가 쉽게 빠져나온다면, 투자자들은 한국의 신인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인다. 세계의 인식을 크게 해칠 것이라는 지적이다.
어떠한 궤변으로도 김씨가 4천8백만 한국 민중을 속일 수 없다는, 김씨의 ‘사면은 안돼’라는 시위대의 외침이 절대 옳다는 지당한 말을 왜 이렇게 바깥에서 들어야 하는가? 왜 이렇게 시장 원칙을 분명히 따르는 칼럼을 이 땅의 주류 매체, 주류 언론인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가? 불룸버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전문 통신의 칼럼이 어떻게 국내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가? 무지인가, 무관심인가? 아니면 여론 조작의 음모인가?
단언 컨 데, 외국의 주류매체는 이번 사건을 ‘논란’으로 보지 않는다. 명백한 범죄 행위와 그에 상응하는 법적 처벌, 사회적 징계의 사안으로 정리한다. 과거의 기억에, 개인의 감정에, 이를 왜곡하고 조장하는 수사학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주류적 판단이다.
늘 시장을 떠드는 한국의 주류매체가 제발 이 수준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현실에 관한 다수가 고개 끄덕일 양식과 판단력을 갖춘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김우중과 관련해 온갖 잡설을 내놓는 신문은 언론, 공론의 자격이 없다. 기본이 안 갖추어졌기 때문에 시장을 해치고 경제를 망치며, 그래서 체제를 좀 먹는 데 무슨 주류인가? 거식증에 빠진 자본뿐만 아니라, 불구화된 주류매체 또한 상식을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망한다. 이게 진보의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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